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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궁 Aug 15. 2022

친구야, 생일선물로 뭐 먹고 싶어?

‘뭐 먹고 싶냐?’

‘응, 생각해 보고 톡 줄게.’

‘그래도 생일인데 좀 근사한 걸로 얘기해라.’


H는 아내의 친구이자 내 친구이다. 우리 셋은 대학교 1학년인 94년에 처음 만났으니 역사가 꽤 깊은 사이다. 아내와 H는 그때부터 절친이었고 나는 H와 겨우 같은 과 동기 정도의 친밀감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아내가 H와의 우정을 길게 유지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도 지금은 연락처도 없는 수십 명의 대학 동기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학연, 지연으로 얽혀서 그 당시에는 죽고 못 살 것 같은 사이도 서로 다른 세상에 살게 되면 사실상 모르는 사람이 되는 건 한 순간이다. H는 우리 식구들에게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존재다. H가 결혼한 친구들에 비해서는 몸이 가벼워 우리 가족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이모가 없는 우리 아이들에게 H는 이모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되어 주었다. 이런 저런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H는 일 년에 서너번 씩 와인 한 병을 들고 우리집에 와서 함께 맛난 음식을 같이 먹는다. 


올해 H의 생일파티를 우리집에서 하기로 했다. 생일을 챙기는 일이 뭔 대수랴 싶을 나이가 되었지만 일 년에 하루밖에 없는 날을 구실로 우리는 모여서 좋은 음식을 앞에 두고 안부를 주고 받고 시시콜콜한 세상 이야기를 한다. 그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삶의 낙이니까. 생일을 챙기는 일도 쑥스럽지만 나이 50 다 되어가는 마당에 생일 선물을 주고 받는 건 더더욱 낯뜨거운 일이라 생일 며칠 전부터 나는 H에게 뭐 먹고 싶냐고 물어 보았다. 선물이지만 선물 티가 안 나서 서로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이 바로 음식이다. 굳이 무슨 날이 아니어도 모름지기 사람이 만나면 차 한 잔이라도 하니까. 


H는 날이 더우니까 우선 가스파쵸가 먹고 싶다고 했고 아무 종류나 좋으니 파스타를 해 달라고 했다. 모두 간단하고 쉬운 요리들이다. 파티 치고는 요청사항이 너무 소박해서 거기에 아보카도 샐러드와 돼지 앞다릿살 오븐구이, 여름이 제철인 가지로 만든 요리를 추가로 제안했더니 친구는 콜을 외쳤다. 생일 파티 음식의 라인업이 완성되었고 나는 장을 보고 요리를 할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가스파쵸로 가볍게 시작하는 파티가 시작되었다. 토마토는 윗 부분에 열십자로 칼집을 내고 끓는 물에 데친 다음 껍질을 벗겨 낸다. 듬성듬성 깍둑썰기를 해 둔다. 빨간색 파프리카도 씨를 잘 제거하고 네모로 자른다. 마늘 한두 쪽도 준비한다. 소금과 레몬즙을 더한다. 올리브유를 붓고 잘 버무렸다가 잘 얼린 얼음과 함께 믹서기에 넣고 곱게 갈면 된다. 걸쭉해진 가스파쵸를 투명한 유리컵에 따라 놓고 파프리카 파우더와 파슬리를 살짝 얹어서 마무리한다. 취향에 따라서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조절하면 되는데 많이 만들어 두고 입이 심심할 때 먹어도 좋을 음식이다. 얼음 동동 띄운 미숫가루를 대체할 만하다. 


아보카도는 가운데 씨가 탁구공 만하다. 반으로 칼집을 낸 다음 살짝 비틀면 한쪽이 분리된다. 한쪽에 박혀 있는 씨는 칼로 툭 쳐서 박히게 한 다음 역시 살짝 비틀면 쏙 빠진다. 숟가락을 과육과 껍질 사이로 넣고 껍질 쪽으로 힘을 더 주면서 파내면 깔끔하게 발라진다. 먹기 좋고 마음 가는 모양으로 썰면 된다. 샐러드 채소를 성글게 썰고 소금과 올리브유로 간을 해서 밑에 깐다. 그 위에 아보카드를 올린다. 감자튀김 같은 걸 올려도 좋은데 집에서 만들기 그나마 편한 건 깍둑썰기 한 감자를 삶은 다음 팬에서 육면을 골고루 튀기듯 익히는 것이다. 삶은 감자를 육면체로 써는 것보다 육면체로 먼저 썬 감자를 삶는 게 여러모로 좋다. 겉바속촉을 추구하면서 지지면 된다.


라구 소스를 만들었다. 라구가 소스라는 말이기도 한데 고기가 중심이 되는 이 소스를 라구 소스라고 한다. 당근, 양파, 샐러리를 잘게 다져서 올리브유에 충분히 볶다가 다진 돼지고기, 소고기와 토마토소스를 넣고 뭉근하게 끓이는 소스다. 이 소스 역시 많이 만들어 두면 만능으로 쓸 수 있다. 부드러운 맛을 더하면 좋을 것 같아서 감자도 넣었다. 토마토소스 말고도 바질이나 타임, 파슬리, 월계수잎 같은 허브 종류를 넣고 같이 끓인다. 남은 와인이 있으면 넣어도 된다. 우리네 된장맛처럼 이탈리에서도 남의 엄마와 우리 엄마 라구소스의 우열을 가리진 못할 것이다. 간 고기가 부들부들해지고 고기의 콜라겐이 녹아나올 정도로 오래오래 끓여야 하는데 시간이 많지 않아 압력솥으로 지름길을 조금 탔다. 스파게티를 알덴테로 삶아 팬에 올리고 라구 소스와 같이 비볐다. 양식맛이 물씬 풍기는 라구 파스타 완성.


가지는 여름을 대표하는 채소다. 가지의 영어 명칭은 Eggplant인데 그 길쭉한 가지에 달걀이라는 이름이 왜 붙어 있는지 의문이었다. 재료도감 가지 편에서 세상에 여러 다양한 가지들 중에서 계란처럼 동그랗게 생긴 놈을 보고서야 궁금증이 해결되었다. 보라색의 매끄럽고 탱글탱글한 외모와 달리 가지는 수분이 많아 무르다. 길이 방향으로 반을 갈라 찜통에서 뜨거운 김을 잠시 쐰다. 자른 면이 위로 가게 네 조각을 가지런히 놓고 그 위에 아까 만들어 준 라구 소스를 고르게 펴 바른다. 모짜렐라 치즈를 솔솔 뿌리고 체다치즈 두 장을 얹은 다음 오븐에서 치즈가 녹을 때까지 익히면 라구 소스 가지 요리 완성. 가지도 라구 소스도 이렇게 활용도가 높다. 


마지막 요리는 슬로우 쿠킹을 대표하는 돼지 앞다릿살 바베큐. 우리집은 돼지 불고기를 하든 오븐구이를 하든 앞다릿살을 많이 쓴다. 삼겹살이나 목살이 비해서 가격은 60% 정도인데 요리만 잘 하면 충분히 맛있기 때문이다. 오븐구이 할 때는 200도 정도 되는 오븐에서 한 시간 정도 익히는 방식을 주로 썼다. 하지만 친구의 생일이라는 큰 이벤트가 있으니 조금 더 오래 굽는 방식을 택했다. 바베큐 시즈닝을 앞다릿살 덩어리에 충분히 바르고 은박지에 싼 다음 150도 오븐에서 다섯 시간을 익혔다. 날을 바짝 세운 칼이 닿자마자 살이 곧장 으스러질 정도로 부드럽게 잘 익은 바베큐가 완성되었다. 한 여름에 오븐을 다섯 시간이나 돌린다고 지청구를 하던 아내도 고기 맛을 보더니 튀어 나왔던 입이 쏙 들어갔다. 


H가 들고 온 와인과 다섯 가지 요리가 어우러진 생일 파티는 잘 마무리 되었다. 심혈을 기울여서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하고 만든 맛있는 일품 양식 요리를 맛있게 먹고 입가심으로 신라면 한 사발을 셋이서 나눠 먹었다. 우리는 중년의 한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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