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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빈 Nov 19. 2018

베짱이의 오해



매거진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매거진마다 유통기한과 소비기한이 다 다르지만 월간지는 대게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시중에 유통되고 이내 자취를 감춘다. 이 유통기한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매체가 가진 성향과 매거진에서 일하는 에디터가 한 달을 사는 패턴이 보인다. 월간지를 발행하는 매체는 보통 빠르면 매달 20일 전에, 아무리 늦어도 25일에는 다음 월에 판매될 매거진을 발행한다. 오늘이 11월 20일이라면 발행되는 잡지는 12월 호인 셈이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 12월 20일이 되면 12월 호는 자신의 자리를 1월 호에 내줘야 한다. 20일 경에 새 매거진이 발행되고 나면 매체는 하루 이틀 정도 휴식기를 보내고 바로 다음 호를 기획해 또 한 번 마감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회초년생 시절을 보냈던 매체는 이 패턴을 가볍게 무시했다. 빠르면 25일, 늦을 때는 월 초에 발행한 달도 있었다.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12월 호가 12월 첫 주에만 발행되면 되지 않나? 그리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꼴지에게 환호하는 레이스는 없다. 이미 다음 레이스는 시작되었는데 꼴찌가 여전히 트랙을 달리고 있다면? 꼴찌 대열에 있는 매거진은 외면받기 일쑤다. 따끈따끈한 12월 호 사이에 놓인 11월 호를 사는 애독자를 아무 매체나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이는 곧 판매부수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다. 에디터 입장에서도 손해가 막심하다. 늦은 마감은 차달의 기획에 영향을 미친다. 월말에 마감을 하고 마감 휴가를 보낸 뒤 곧바로 일을 시작하더라도 다른 매체는 기획부터 섭외까지 마친 상태다. 이슈 있는 아이템을 다루는 경우 선두를 타 매체에 빼앗겨 마감에 임박할 때까지 순서를 기다리거나 아예 차달로 미뤄야 하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한다. 판매 부수뿐 아니라 에디터의 일 역시 꼴찌 탈출이 어려운 셈이다. 



IT 테크 관련 매체에선 신제품 선점이 중요하다. 한 달 사이클인 월간지는 선점하지 못하면 또 다시 한 달을 기다려야 하고 이는 시의성을 놓칠 확률이 높아진다. 첫 매체가 느긋한 꼴찌의 얼굴이 가능했던 데는 업계의 유일무이한 전문지라는 점이 컸다. 신제품 섭외 경쟁 없이 기다리기만 하면 매달 아이템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자연스레 에디터는 밥을 다 차려줘야 첫술을 뜨는 수동적 인간이 됐다. 마지막 주에 일찌감치(?) 마감을 하고 나면 첫 주에는 기사 거리가 없어, 정확하게는 기사 거리를 기다리느라 개인 블로그에 글을 쓰거나 웹툰을 보며 시간을 떼웠다. 둘째 주부터 하나 둘 들어오는 기사 거리는 마감에 임박할수록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급기야 마감 주에 밤을 새우지 않고서는 마감일을 지키기 어려운 달이 잦아졌다. 마감일을 맞추기 위해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찜질방을 욕실처럼 쓰는 에디터도 있었다. 면접 때 사무실에 라꾸라꾸 침대가 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매달 첫주만 되면 내 블로그에는 새로운 글이 업데이트됐다. 동료들과 같이 베짱이가 되기로 했다. 눈치밥 좀 먹어본 나는 홀로 일찍 일을 시작하고 마친다고 해서 마감의 패턴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막내의 나홀로 퇴근이 용인되지 않던 회사였으니까. 이직한 두 번째 매체는 업무 시간도 업무 장소도 자유로운 편에 속했다. 매달 정해진 시기에 매거진만 나온다면 언제 어디서 기사를 쓰던 아무도 관여하지 않았다. 그만큼 책임이 따랐다. 두 번째 매체는 첫 번째 매체와 동종 업계의 신생 매거진이었다. 신제품을 선점하려면 기획력을 인정받거나 빨라야 했다. 전자를 보여주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터였고 선배들은 빠른 발행을 택했다. 이때 주니어 에디터였던 내게 가장 부족하다고 느꼈던 능력이 시간관리였다. 2주 동안 베짱이처럼 탱자탱자 놀다가 마감 기간만 되면 밤을 새며 후회하길 반복하는 삶에 익숙한 베짱이가 개미처럼 마감을 미리 대비하기란 쉽지 않았다. 



베짱이는 능률을 올리기 위해 변화를 결심했다. 완벽한 J형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었다. 야심차게 월 단위와 주 단위 그리고 일 단위 계획을 짰다. 스케줄표의 시간이 촘촘하게 흘렀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나도 선배들처럼 야근 없이 9 to 6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에 찼다. 이직 후 세 번째 마감을 치면서 깨달았다. 매거진은 혼자 만드는 게 아니고 변화를 결심한 베짱이를 가만두지 않는 배짱 베짱이는 어딜가든 존재한다. 브랜드 담당자나 외고 작가 등 하나의 기사, 한 권의 매거진을 완성하기 위해 소통해야 될 사람이 많았다. 그즈음 나는 극P형 인간의 뇌를 해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할 수만 있다면 뇌를 고쳐놓고 싶다 악한 마음도 품었다. 어떤 멘트 학원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하나같이 “마감이 오늘인 줄 몰랐어요.”, “그게 오늘이라고요?”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나마 연락이라도 되는 사람은 고마운 사람이었다.



에디터는 늘 변수와 싸우는 직업이기도 했다. 나는 주로 구글 캘린더로 스케줄을 관리했는데, 어떤 주에는 같은 일을 월요일에서 화요일, 다시 화요일에서 수요일로 미루다 결국 다음 주까지 넘어간 적도 있다. 제품 출시가 미뤄지고 이전 대여자가 반납을 미루고 작가가 약속을 잊고 행사는 취소되고. 하루에도 예측 불가능한 일들은 수시로 일어났다. 또 내가 매일 매일 나와의 약속을 지키며 업무를 잘 처리했다 하더라도 다른 에디터가 변수와 싸우고 있다면 어쩔 수 없이 같이 고행의 길에 올라야 했다. 



개미의 시간 관리 법칙이 가진 요점을 몰랐던 베짱이는 개미를 쫓아가려다 예측 불가능한 변수에 스트레스로 만성두통에 시달리고 만다. 나는 가장 먼저 몇 가지 기사 패턴을 익히고 일의 단계를 나눴다. 각 단계에서 대략적으로 소요되는 시간을 체크했다. 이 사이클을 토대로 한 달의 시작에 대략적인 월 단위 큰 계획을 짜고 월요일마다 주 단위, 아침마다 일단위 계획을 짰다. 하루를 우선순위에 따라 일을 처리했다. 오늘 반드시 끝내야 하는 것과 이번 주 안에만 끝내면 되는 것을 명확히 구분 지었다. 퇴근 전 적어도 10분 정도는 오늘 할 일을 체크하고 못한 일의 스케줄을 다시 조정했다. 그러고 나니 변수에 대응할 만한 몇 가지 꾀를 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주마다 일이 치고 들어와도 될 정도의 여유 시간을 둔다거나, 외고 작가의 마감일을 예정보다 이틀 정도 당겨서 말한다거나.



이처럼 개미는 실은 매일 열심히 일하는 게 아니다. 효율적으로 일하는 것일뿐. 자신의 하루를 시간 혹은 분 단위로 쪼개 놓은 철저한 관리감독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의 일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변수에도 흔들리지 않고 조율할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시간의 법칙을 다른 이의 것과 맞춰 독자를 위한 한 권을 만드는 일, 그것이 에디터가 갖춰야 할 시간 관리의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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