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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빈 Mar 01. 2021

매일 파도를 타는 마음으로



 책임감은 쓰다. 매일 물처럼 달고 사는 커피를 생각하면 영 삼키지 못할 것도 아니지만, 어릴 적 수저를 들고 쫓아오는 엄마에게서 맛봤던 물약의 쓰디씀을 생각하면 덜컥 겁부터 난다. 주니어 에디터였을 때는 물약이 쓰다며 선배 뒤로 숨어 눈을 질끈 감기 바빴다. 생일 초 앞에서 소원을 빌 때처럼 다시 눈을 떴을 땐 선물같이 달달한 세상이 펼쳐질 거야, 그렇게 믿었다. 어린아이의 어리광 같은 것이 용인되는 나이이자 연차였으므로. 올챙이 시절은 미화되기 마련이고, 직급이 오를수록 후배의 물약까지 달게 삼켜야 한다는 사실이 가끔은 버겁다. 아무리 그럴싸한 명함과 겉모습으로 치장해도 아직 어른이 되는 법을 모른 채 그때에 머물러 있는 어린아이가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에 예견된 사실이었다. 일찍이 선배를 잃고 남들보다 빨리 시니어 에디터가 됐다. 함께 난파된 배를 고쳐가며 위태로운 항해를 시작한 동료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이를 앞세워 사양 산업이라는 종이 매체가,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몹쓸 자존심이 나아갈 길을 보게 했다. 어린 나이, 미숙한 경험을 잣대로 판단하려는 이들에게 상처 받지 않으려 몸집을 부풀렸다. 전문지 에디터는 앎의 범위가 넓고 깊어야 했다. 새로운 세상에서 선두를 달리면서도 과거의 기술을 돌아보는 여유가 당연시됐다. 그에 반해 가진 것의 한계는 분명했다. 비전공자에 오덕후 같은 면모도 없었다. 좁고 얕은 세계에서 그보다 더 작은 몸집을 가진 어린아이에겐 매일이 허우적대는 일뿐이었다.



 업계 누군가가 하는 말은 당연히 알아야 할 지식으로 여겨졌다. 턱 끝을 치켜들고 고개를 끄덕이는 ‘척’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뒤로는 늘 구글과 편을 먹고 전문 용어와 씨름하는 시간이 밤새도록 이어졌다. 입사 3개월 만에 두께가 족히 1.5cm는 되는 노트의 끝 장을 마주하면서 깨달았어야 했다. 쉽게 올 곳이 아니었구나. 미팅, 회의, 인터뷰 곳곳에서 나만 모르는 외계어가 난무했고 귀는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소리를 제멋대로 주워 들었다. 나름 그럴싸하게. 구글도 헤매는 그럴싸한 단어를 붙들고 몇십 개의 탭 파도를 탔는지. 멀미가 난 얼굴로 매일 아침을 맞았다. 설상가상 이게 맞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 날이 대다수였다.



 자존심을 지키려는 책임감은 무서운 기세로 무게를 늘려갔다. 지켜낼 것은 또 왜 이리 많은지. 동료들은 나를 공격수로 임명하고 최전방에 세웠지만 내향적인 수비형 인간에게 협상의 순간은 늘 곤욕스러웠다. 우리가 가진 것에서 무얼 양보하고 무얼 지켜내야 하는지. 물러서는 순간 우리는 연료와 시간과 동력을 잃을 게 뻔했다. 한계선으로부터 몇 발자국 앞서 나가 방어벽을 세우는 일이 최선이었다. 이걸 내어줄 테니 이 선은 넘보지 말아 줘. 부드러운 말로 상대를 어르고 달랬다. 안돼. 선을 침범하는 누군가와 맞딱들일 때면 온 힘을 다해 막아내는 통에 며칠 몸과 마음이 쓰렸다. 결과는 늘 참패였다. 퀸스 갬빗의 엘리자베스 하먼이 보르고프와의 첫 경기에서 완패했을 때처럼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시뻘건 눈을 하고서도, 도저히 집 안에 틀어박혀 문을 걸어 잠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켜야 할 삶의 크기가 너무 컸다.



 이제는 안다. 빈 깡통의 요란함은 숨길 재간이 없다. “그 작가 아세요?”의 끝은 “네”가 아니라 “아니요. 어떤 분인데요?”여야 한다는 사실을. 그러면 대화는 상대가 아는 이야기로 채워질 테고, 이 시간 이후엔 그 모든 대화가 나와 독자의 몫이 된다. 위로 올라갈수록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인정하는 솔직함이, 우리가 해낼 과제의 한계를 알고 뚜렷한 선을 긋는 명료함이 더 큰 무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행히 자존심이 빠져나간 책임감은 제 무게를 찾았다. 문제는 책임감의 결과가 때때로 달다는 진리는 변함이 없다는 데 있다. 매달 25일이면 발행되는 매거진 한 권에 누군가는 즐거워하고 신생 브랜드는 존재의 이유를 찾아가기도 한다. 거대한 담론이나 특종 딱지를 단 대단한 기술을 다루지 않아도 매달 누군가는 우리의 항해가 만든 결과물을 찾는다. 누군가 의미 없이 달아둔 댓글 하나에, 브랜드의 고맙다는 전화 한 통에 책임감의 무게는 금방이라도 날아가버릴 듯 가벼워진다.



 우리가 계속 항해해야 할 이유는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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