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고 왜 말못해!
2009년 5월 어느 날 우리 팀은 수원 하나로 마트 앞에서 이벤트 중이었다. 북 세일즈를 할 때 어린아이를 둔 엄마들이 많이 찾는 곳에서 홍보하는 건 가망고객을 찾는 중요한 행사다. 아이들에게 풍선을 불어 주고 아이 엄마들에게는 책과 교구를 설명하면서 상담 예약을 받느라 팀 모두가 정신없이 바쁘게 하루를 보낸다. 이때 얻은 정보로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은 많다’는 가망고객 수첩이 넉넉해진다. 저녁 무렵이면 마트에 오는 아이 엄마들이 뜸하다. 그 시간은 이벤트 나온 우리의 간식과 수다 타임이 된다. 함께 일하던 이 부장이 병마로 사경을 헤맨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를 무조건 지지하고 부러워했던 선배다. 나는 잠시 자리를 옮겨 선배에게 전화했다. ‘전화를 받을까?’ ‘한 번만 통화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신호를 기다리는데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우리 팀이 이벤트 나왔고 누가 누가 나왔고 어떤 일이 있고 자세히 상황을 설명했다. 이 선배랑 수많은 이벤트를 했기에 마치 함께 나와서 일하는 듯 힘든 그녀의 목소리에도 흥분이 느껴졌다. 한참을 통화하고 마무리하려는데 이 선배가 말했다. “배부장 사랑해” “고마워요.”라고 대답했다. 돌아서며 ‘나도 사랑해요.’라고 대답하지 못한 게 찜찜했다. 팀에 돌아와서 이 선배랑 통화했다니까 국장님이 나더러 운이 좋았다고 한다. 이게 나를 무조건 좋아해 주던 이 선배와의 마지막 통화였다.
며칠 후 선배가 돌아가셨다. 수원 연화장에서 장례가 진행되었다. ‘냉각 중’ 이라는 단어가 모니터에 뜨고 한참 후 장례를 돕는 분이 우리에게 물었다. 영정사진을 들고 갈 친구분이 누구냐는 말에 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선배를 모셔다드리고 싶었다. 직원은 나에게 따라 오라고 했다. 유리창 너머 테이블에 선배의 이름이 적힌 이동식 선반이 있었다. 슬라이드를 끌어내자 하얀 뼈가 나왔다. 직원이 뼈를 통에 담아 커다란 옥새 같은 거로 큰 뼈를 신중하게 부수었다. 유골함에 그녀가 들어갔다. 그녀의 초등학생 아들이 보자기에 싸인 유골함을 들었다. 성민이는 무겁다고 칭얼거렸다. 나는 그녀의 영정사진을 들고 천천히 걸었다. ‘선배가 좋아하는 꽃이 만발한 오월이에요. 하늘나라에서는 아프지 말고 푼수 떤다고 눈치 주는 사람 없을 테니 마음껏 웃으세요’ 이 선배에게 말을 걸며 한 걸음 한 걸음 세듯이 걸었다. 선배를 작은 유리 안에 넣어 드리고 국장님과 엄 부장과 나는 몇 년 동안 어버이날 무렵이 되면 그녀를 만나러 갔다.
언젠가 회사에서 연수를 갔다. 긴 시간 교육으로 지루해하던 이선배는 매뉴얼에 그려져 있는 동그라미 스무개에 각기 다른 그림을 그려서 우리들 놀라게 했다. 식당에서 기다릴 때는 냅킨을 접어 장미꽃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팀 회식을 하러 레스토랑에 가면 웨이터를 불러 특이한 소스를 요청한다. 없다고 하면 괜찮다고 하면서 이선배 특유의 미소를 짓는다. 사무실에서 간식를 먹을 때도 그냥 조용히 먹는 적이 드물었다. 특히 바나나를 조용히 까먹지 않고 짙은 농담을 하기도 해서 우리 팀의 젊은 팀원은 눈살을 찌푸리고 그녀를 주책이라며 싫어하는 팀원도 있었다. 나는 그녀가 주책스럽게 구는 헛헛한 마음을 알기에 수위가 높아질 때면 슬며시 그녀를 제지하기도 했다. 이선배가 돌아가시고 몇 년은 마음이 눅눅했다. 특히 꽃이 피는 계절에는 남편과 산책을 하면서 이선배 이야기를 많이 했다. 몇 년이 지난 어느날 남편이 “이제 이부장님 얘기 안하면 안돼?” 라고 할 만틈 그녀의 죽음은 내마음을 힘들게 했다.
그녀가 돌아가시고 그녀의 딸을 두 세 번 만났다. 예쁜 그 아이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잠을 못잔다고 했다. 그 아이와 밥을 먹으며 조심스레 대화를 했다. 송이가 말했다. “엄마가 배부장님은 한결같은 분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팀에서 누가 만나자고 해도 만나주지 않던 아이가 몇 번의 연락 끝에 나를 만나러 와 준 것이다. 평소 신경치료를 받는 줄 알았기에 병원을 같이 가겠냐고 물었다. 그렇게 하고 싶다는 아이 말에 식사를 마치고 아주대학교 앞에 있는 병원에 가서 상담을 하고 약을 처방 받았다. 중간에 연락해서 한번 더 만났다. 송이에게 엄마같은 아줌마가 되어 주겠다고 말했는데 연락이 끊어져서 이 후 소식을 알 수 없다. 다만 그 아이가 피아노를 전공했고 교수님이 독일 유학을 추천했다는 대화를 생각하며 독일로 유학가서 아이를 사랑해주는 멋진 남자를 만나기를 기도했다. 이선배를 닮아서 섬세하고 재능이 많은 아이 같았다. 발달이 느린 동생 성민이는 아빠랑 지낸다고 했다.
선배의 죽음은 내 나이 마흔 넘어 처음 느낀 죽음이었다. 십년 넘게 북세일즈를 하면서 서로의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고 부부싸움을 왜 했는지 얼마나 수시로 싸우는 지 알았고 외롭고 힘들게 살면서도 짬만 나면 장난을 치고 웃고, 가끔 땡땡이를 쳤다. 내가 누군가를 흉이라도 보면 소스라치듯 놀라며 “배부장답지 않게 왜 그래? 하면서 도끼눈을 뜨고, 팀이 아산에 있는 스파에 갔을 때 벗은 몸을 보고 ”배부장은 명화에 나오는 여자같애“라고 하얀 내 몸을 소문내기도 했었다. 버스 타고 수원시내 곳곳을 다니며 세일즈해도 퇴근 시간 다섯 시 삼십분을 칼 같이 지키며 나의 아이들을 의젓하게 잘 키운다면서 칭찬하고 부러워했었다. 나의 아버지의 무조건지지 ‘우리 정미는 뭐든지 잘해’라는 말씀 말고, 타인의 무조건 지지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배부장은 아이도 잘 키우고 일도 잘하고 가정도 잘 가꾸는’ 사람이라면서 팀원들에게 마치 자기자랑처럼 내 자랑을 해주곤 했었다. 가족이 아닌 타인이 지지해주는 무조건사랑을 이선배에게 받았는데, 그녀의 마지막 말 ”배부장 사랑해“에 고맙다고만 말한 나의 입을 한동안 원망했다.
2010년 12월. 아버지의 차가운 볼에 볼을 비비며 울부짖었다. “아버지 사랑해요. 아버지 죄송해요” 아버지께 사랑한다는 말을 얼굴보고 한 기억이 없다. 아버지는 갑자기 쓰러지고 넉 달만에 돌아가셨다. 암이 온 몸에 퍼진 사진을 보고 큰언니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쓰러지면서 하반신 마비가 와서 집에서 엄마가 아버지를 돌보아 드렸다. 엄마는 넉달 동안 지극정성으로 아버지를 돌보셨다.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 치악산을 생각하면 손에 닿던 유골가루의 뜨끈함이 손끝에 느껴진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친정엄마께 사랑한다고 잊지 않고 말하려고 휴대폰에 ‘사랑하는 엄마’라고 변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리있게 ‘사랑하는 어머니’라고 시어머니 전화번호도 변경했다. 전화가 오거나 전화를 걸려고 할 때 ‘사랑하는’ 이라는 단어를 보면 사랑한다고 말하는 걸 잊지않게 되었다. 지난 해 시어머니를 떠나보낼 때 천국 문앞까지 들릴만큼 큰 소리로 불러보았다. “어머니 사랑해요, 어머니 감사해요, 어머니 죄송해요” 장레지도사분이 어머니가 누워 계신 관에 마지막 인사를 적으라고 할 때 내가 적으면 안되냐고 울부짖으며 물속에서 눈 뜨듯 부릅뜨고 적었다. ‘사랑합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의 로런스 워드 교수 연구진이 최근 국제 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사망 직전 환자도 일반인과 똑같이 뇌가 소리에 반응한다”고 밝혔다. 나의 시어머니 장례를 도와 주신 남편 고향 친구의 동생이 되는 장례지도사분이 정성을 다해 시어머니 가시는 마지막 길을 인도해주셨다. 2남 5녀가 울부짖으니 조용히 말했다. “돌아가실 때까지 귀가 열려있느니 못 다한 말씀 있으시면 다 하세요. 그리고 수의에 눈물 흘리시면 무거워서 하늘나라 못 올라가니 수의에 눈물 흘리지 마세요” “울지마, 뚝 해!” 어린아이를 혼내는 엄마 말에 울음 참듯 우리는 입을 막고 울음소리를 죽였다. 어머니는 가볍게 하늘나라에 올라가셨을 것이다. 나는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고 어머니께 중얼거린다. ‘어머니, 어머니 금쪽같은 아들과 사이좋게 잘 살게요’ 특히 못마땅할 때 표정이 시어머니를 꼭 닮은 남편을 보면서 가끔씩 나는 성질을 죽인다. 그리고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한다. 제기랄, 아꼈다 뭐하려고 그걸 아꼈나. ‘사랑해요’
때로 제가 뜬금 없이 “고마워요”라고 하거나, 한참을 뜸 들이다 “고마워요”라고 말할 때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괜한 오해를 부를까봐 ‘고맙다’를 대신합니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오잘^^
참, 당신은 언제부터 행복해 질 예정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