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2] 파이이야기

이야기의 힘

by 지민

<파이이야기>는 워낙 유명한 책이고 나 또한 오래 전부터 이 책을 가지고는 있었다. 하지만 구입하던 당시 책을 읽을 상황이 못 되어 방치 해두었던 게 무려 8년여 세월을 지나 내 손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사실 책을 읽지 않았다 해도 <파이이야기>를 영화화 한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를 이미 보았기 때문에 내용 자체는 알고 있었지만, 책이 원작이기도 하고 워낙 흥미로운 이야기라서 텍스트로 꼭 한번 접해보고 싶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주인공 ‘파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토록 제목이 단순할 수가!) 파이는 인도의 폰디체리에서 부모님, 형과 함께 살아가던 평범한 소년이었다. 파이의 집안은 특이하게도 동물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경영난에 허덕이던 부모님은 캐나다로의 이민을 결정하게 된다. 떠나기 전 대부분의 동물들은 이곳저곳 동물원에 팔아넘기지만, 북미에서 값비싸게 팔릴 몇몇 동물들은 화물선에 태우고 함께 캐나다로 떠나게 된다. 하지만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배가 침몰하고, 파이는 구명보트에 던져저 운좋게 목숨을 구하게 된다. 그러나 부모님과 형의 생사는 알 수 없었고, 구명보트에는 벵골호랑이, 하이에나, 오랑우탄,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이 함께 타게 된다.

파이는 무려 7개월 넘는 긴 기간 동안 구조되지 못한 채 구명보트를 타고 태평양을 항해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하이에나가 처음엔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을 잡아먹고 다음에는 오랑우탄을 잡아먹는 것을 보고 파이는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지만, 결국 하이에나도 벵골호랑이 ‘리처드 파커’에게 잡아먹히게 되어 결국 배에는 파이와 리처드 파커 둘만 남게 된다. 처음엔 호랑이와 한 배에 있다는 게 너무 겁이 났지만, 파이가 누구던가? 그는 동물원을 경영하던 집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동물의 생태를 잘 알고 있었기에 리처드 파커를 길들여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공존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이후 어느 순간부터 파이는 리처드 파커와 단순히 공존하는 것을 넘어, 그에게 감사와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리처드 파커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한 덕택에 오히려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단조로운 수평선이 끝없이 펼쳐지는 날에도 리처드 파커 덕분에 배를 점검하고 식재료를 구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무서운 밤에는 리처드 파커의 존재로 인해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어쨌건 필사의 노력으로 항해하고 버텼지만 더이상 음식도, 물도 없고 기력도 다 떨어져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려 할 때쯤 이 둘은 멕시코 해안가에 도달하게 되고, 파이는 그곳 주민들에게 발견되어 살아남게 된다. 한편 리처드 파커는 해안가에 도착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을 향해 멀어져갔는데, 파이는 7개월여 시간을 함께 한 리처드 파커가 그렇게 마지막 인사도 없이 홀연히 떠나가 버린 것이 너무나 서운해 울며 가슴 아파한다.


‘파이이야기’는 이야기의 당사자인 ‘파이’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다. 한번은 우연히 파이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캐나다 작가에게(이 시점에서 파이는 중년이며,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 한 번은 구조되었을 당시(16세 소년의 파이가) 오이카 해운 – 파이가 탔던 화물선 ‘침춤호’를 운영하던 일본 회사- 직원들에게.


사실 파이의 생존이야기는 얼핏보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면이 있다. 16세 소년이 혼자 구명보트에 남겨져 7개월여간 태평양을 항해 했다는 자체도 놀라운 일인데 배 안에 벵골호랑이 한 마리가 같이 타고 있었다니. 이 때문에 당시 오이카 해운 직원들은 파이에게 대놓고 그의 이야기를 믿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진상을 밝히고 상부에 보고해 보상 등의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 선박회사 직원으로서는 이 ‘소설 같은’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믿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러자 파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믿지 못하겠다면,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와 통하는 듯 하면서 훨씬 사실적이다. 사실 배에는 동물들이 함께 탔던 게 아니라, 사람들이 같이 탔다고 한다. ‘얼룩말’은 다리가 부러진 선원, ‘오랑우탄’은 파이의 어머니, ‘하이에나’는 비열하고 잔인한 프랑스 요리사, ‘호랑이’인 리처드 파커는 파이 자신에 대응된다. 프랑스 요리사는 다리가 다친 선원의 다리를 잘라 미끼로 사용하고 그의 인육을 먹는다. 하지만 그는 낚시에 재주가 있었고 조난 당한 상황에서 유능한 사람이었기에 파이와 어머니는 끔찍했지만 참고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파이가 실수로 바다거북을 놓치게 되고 프랑스 요리사는 파이를 때린다. 이를 참지 못한 어머니가 요리사와 다투다가 요리사가 어머니를 죽이고, 파이는 눈앞에서 어머니의 시신이 바다에 빠져 사라지는 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이후 화를 참지 못한 파이가 요리사를 칼로 찔러 죽이고 혼자 남아 멕시코만에 도달해 구조되었다는 것이다.


파이는 말한다. 양쪽 이야기 모두에서 배는 가라앉고 그는 가족을 모두 잃고, 고통받는다고. 그리고 한편 청자로서 어떤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결국 증명할 수 없다고. 그러면서 파이는 묻는다.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Which story do you prefer?)

이 질문은 참으로 오묘하고도 심오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어떤 사건을 접했을 때 ‘실제 사실’이 무엇인지 밝히려 들곤 하지만 그것을 안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어떠한 사건이든 전지전능한 신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한편, 어쩌면 사실 그 자체를 안다는 것은 우리 생각만큼 중요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파이의 말처럼 결국 배는 침몰했고 가족은 다 죽었으며 그는 이미 고통받았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알 수 없는 사실을 밝히고자 힘 빼는 대신 ‘더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택하는 방식으로 어떤 사건을 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리처드 파커가 존재했든, 존재하지 않았든 파이는 그 덕분에 살았고, 그를 사랑했고, 가슴 시리게 그를 그리워했다. 어쩌면 파이의 두 가지 이야기 중 두 번째 이야기가 ‘사실’에 더 가까울지 모르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는다. 대신,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극한의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도 마음을 위로해 줄 이야기를 하나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들려줄 그럴싸한 이야기 한 편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알 수 없고 어쩌면 알 필요도 없는 사실에 매달려 건조하고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멋진 일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독서기록-1]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