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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갤럭시편지 Aug 10. 2018

마주한 장면

-돌봄의 단어가 가지는 경계들: 돌봄은 왜 저평가 되었을까?-

나는 일의 특성상 돌봄노동자들을 자주 만난다. 혹은 사무실에 앉아서 돌봄노동자들의 현실과 그들이 말하는 돌봄에 대해서 종종 자주 생각한다. 기획과 홍보의 특성상 언론기사들 사이를 찾아 헤매게 된다. 하루에도 한두건씩 ‘돌봄’에 대한 사회적 합의나 이미지는 무엇일까?하고 고민하게 하는 글이나 맥락을 발견한다.    


“간호노동은 돌봄노동으로 포함되어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요”

“돌봄노동자들은 간병인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저평가를 받고, 심각한 자괴감을 느끼죠”    


돌봄이라는 단어에 포함되었을 때 저평가 받고 자괴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돌봄영역에 편입되면 사회적인 저평가를 받아서 낮은 처우를 받기 때문일까? 일차적으로는 그럴 것이다.


실제로 돌봄노동은 전통적인 여성노동으로 비공식 노동이었다가, 공식노동이 되어 직업군으로 편입한지 한국에서는 언 20년 안팎이다. 세계적으로도 돌봄노동은 80%이상 여성이 수행하는 노동으로 낮은 사회적 평가와 보상(정확하게는 임금)을 받아 왔다. 사회적 시스템의 낙인으로 인해, 돌봄이라는 단어안에 포섭되는 것은 곧, 돌봄=사회적 저평가, 무시로 등치되는 이상한 문법이 생겼다.    


내가 고민스러운 부분은 일상에서 돌봄이 다루어지는 방식도 포함되어 있다.

흔히들 여성 커뮤니티에서는 ‘돌봄’이 안팎으로 주요 이슈가 된다. 아마도, 남성들은 “요즘은 세상이 바뀌어서 남성도 돌봄에 동참해야지 하하하” 정도의 농담만 오갈지 모른다.(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돌봄이 주요 이슈인 남성을 만나보진 못했다. 남성으로써의 독박돌봄은 어떤 것인지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 싶을 정도이다.)    

그런데 종종 귀에 거슬리는 맥락이 있다.


“전 돌봄노동은 체질에 맞지 않나봐요. 남을 서포트하고, 지원하는 일이 즐겁지 않아요. 아마 이것도 타고난 사람들이 있나봐요.”    


돌봄노동이 체질에 맞지 않다? 사실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왜냐면 돌봄노동이라는 것이 사실상 부모가 아프거나 노인을 돌보거나 아이를 양육하는 사람이나 직업적으로 돌봄을 수행하는 이들의 고유활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건 불가능한 이야기다. 누군가를 만나서 관계를 맺고, 안부를 묻고, 기분을 살피고 하는 포괄적인 ‘돌봄’을 우리는 주요하게 주고받는다. 그게 부모든, 동료든, 친구든.        


일반화 하긴 어렵지만, 난 내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확인했을 때 돌봄노동, 감정노동과 같은 전통적인 ‘여성다움’ 속에서 강요되어 왔던 속성들을 일면 인위적으로 “나의 속성이나 나의 삶의 일부분이 아니야”라고 거부할 수 있겠단 생각을 했다. 특히 여성들이 말이다.    


왜냐면, 이건 전통적으로 여성들에게 강조되어온 억압적 노동의 일부임이 분명했고, 돌봄은 여성이 가정에서 수행했던 노동으로 비공식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비전문적인 영역임이 대대적으로 암묵적으로 강하게 주입되어 온 생각이기 때문이다.     


“요양보호사들을 가사도우미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요”    


나는 오늘도 열심히 설명한다. 요양보호사들이 자신의 노동조건의 개선이나 낮은 사회적 처우를 비판하고 바꾸라고 요청하는 일에 목소리 높여야 하지만, 우리 스스로 다른 돌봄이나 가사노동의 영역을 낮게 비추어 비판하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고.


실제로 많은 비판의 목소리가 그렇다. 간호사는 자신의 노동이 돌봄노동이 아닌 의료노동으로 포함되길 바란다. 요양보호사는 가사노동자가 아닌 돌봄노동자로 포함되길 바라며, 간병사로 불리긴 바라지 않는다. 1인 비혼여성은 사회생활을 덜 피곤하게 하려면 돌봄노동이나 감정노동보다는 이성적인 영역의 노동을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낫다.    


어떤 면에서 돌봄이라는 단어는 오염되었다. 오늘도 어디선가 호명될 ‘돌봄이라는 말이 싫어요!’. 그러나 분명 그렇게 부르짖는 모두는 강요된 돌봄을 수행하거나, 돌봄이라는 이름의 강요되는 자질구레한 잡일과 감정노동을 거부하고자 하는 몸부림일 수 있다.


우리가 선택한 ‘돌봄’과 ‘관계’가 자유로울 때, 의료≫돌봄≫간병과 같은 대면서비스 위계를 벗어날 수 있으며, 돌봄이 긍정적인 언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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