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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갤럭시편지 Sep 02. 2018

가부장제 닮은 조직문화 #1

위계에 의한 한국조직에서 팀장되기


문제의 출발


# 시작글 <새로운 역할, 팀장>

내가 일하는 비영리 조직에서 새로운 역할로 팀장이 되었다. 6년차 한 조직에서 근속하면서 내부 승진을 한게 뿌듯하기도 하고 한편 마음이 무겁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기뻤다. 하지만 업무, 일 만큼은 자신있다 생각했던 내가 팀장이 되면서 업무와 인간관계에 대한 더 많은 고민과 번민에 휩싸이게 된다.


생각해보면 이게 다 ‘며느라기’같은 ‘팀장 증후군’의 덫에 걸린게 아닌가 싶다. 아직 모를 수있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면 '며느라기'란 가부장제 한국사회에서 며느리가 되면 시댁 식구들에게 예쁨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그런 시기를 일컫는다. 자발적인 자기 선택이라기보다는 주변에서 기대하는 역할에 갇혀서 나 자신의 욕구나 생각을 직면하지 못하고 주어진 역할대로 움직이는 상태를 말한다.


아직 언 5개월밖에 안되었지만, 나는 팀장이 되고나서 며느라기보다 더 무서운 팀장병에 시달리는 것 같다. 사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초짜 팀장으로서 더 나은 업무 능력에 대한 압박을 넘어서 한국의 특이한 직장문화에 대한 고민과 번뇌로 이어진다. 내가 받아들인 고민과 번뇌에는 사회적으로 '팀장'에게 요구되는 강요들이 깃들어 있다고 보았다.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보았다. <# 문제1: 가부장제를 닮은 조직문화>, <# 문제2: 장시간 노동 권하는 '죽은 노동의 사회'>, <# 문제3 : 번민하는 우리>




가부장제를 닮은 한국의 일터


가부장제란 '가장이 가족성원에 대하여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가족을 지배, 통솔하는 가족형태'를 말한다. 한국의 일터는 가부장제의 핵심적인 속성인 '위계'와 '나이'에 의해 구성되기에 그 속성이 아주 유사하다고 보았다. 가부장제의 가장에 주목해보자. 97년 외환위기 이전, 가부장제 속 '가장'은 다소 안정적인 경제적 힘을 기반으로 가족 안에서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지고 모든 일을 결정했을 것이며 구성원 개개인의 상태를 관리했을 것이다. 구성원이 그를 두려워 했든 존경했든 그는 '전제적 가장'이다.


가부장제의 가장이 가지는 본연의 마음은 '우리 가족이 잘 살려면 이 길이 살 길이야!'하는 진심 어린 책임감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이러한 '책임감'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끼니와 생활을 유지하는 자양분임에도 불구하고, 독점적인 결정권을 가진 위력으로 이어지며 '위력에 따른 위계'를 구성한다.

그렇기에 '책임감'이라는 긍정적인 동기에도 불구하고 통제되지 않은 독점적 권한은 책임감과 같은 선한동기로 정당화될 수 없다.



책임과 위계,
그 어디쯤 통제되지 않은 권력


여기서 '가장'을 한 조직의 대표와 등치한다면? 한국사회의 조직은 한 조직의 최고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많은 이름의 '장'들에게 가부장제 속 가장과 같은 권한을 부여하며 위계에 따른 노동분업구조를 형성한다.

여기서 문제는 '노동분업구조' 자체보다는 통제되지 않은  '위계'에 대한 통제방안이 연약하거나 부재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통제방안으로 '노동법(근로기준법)'이 있는 데, 아무리 노동자가 우회적으로 좋게 말해도 또한 지적받는 관리자나 사업주가 세련되게 대처하려해도 한국사회의 고용주는 법을 들어 비판받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TV에 나오는 재벌들은 자신이 갑임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상상하기 힘든 비인간적인 갑질을 자행하지만,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용주들은 자신이 갑임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함으로써 갑질을 행한다.

이런 사용주들에게 법을 들어 지적하면 '넌 사용주다.', '권한이 있으면 의무를 다해야지'하는 자기이해의 권고가 되기때문에 정서적 거부감이 굉장히 크다.

더구나 한국사회에서는 사용주가 기분이 상하면 그것이 위법사항이라도 철저히 지키지 않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든지 허용된다.

 

또 다른 통제방안은 '민주적인 조직운영 및 소통'이다. 한국의 많은 일터에서 종종 '민주적=인간적'으로 잘못 읽히는 경우가 참 많다. 개인과 개인이 만나서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정감을 나누는 '인간적'인 관계와 소통은 조직적 방향과 원칙에 따라서 구성원이 자유롭게 토론하고 논의하여 무언가를 결정하는 '민주적'인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이러한 착각이 난무할 만큼 한국사회에서 민주적으로 소통하는 과정은 실습이 덜 된 무언가와 같다. "어떻게 소통하고 결정하는 것이 민주적인가?"에 대한 구성원들의 학습 정도가 연약한 상황에서 민주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이라고 착각하는 관리자에 의해서 위계는 그대로 두고 침묵하거나 혹은 필요이상 말만 많은 조직문화의 오류를 범하기 쉽다.



나이주의가 더하는 위계의 재생산


이렇게 통제되지 않은 위계 가득한 일터에서 일의 특성이나 합리적인 원칙에 의해서 분업구조를 이루기 쉽지 않다. 야생적인 것합리화 기제가 필요하며, 한국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게 그것이 '나이'라고 보았다.


나이에 대한 유령같은 믿음들이 조직을 지배한다. "나이 만큼 사람은 나이값을 한다→경험과 연륜은 무시 못한다. →나이에 맞게 예우를 해줘야 한다→ 단순 잡무는 젊은 사람이 해야 한다"하는 노동문화는 지배적이다. 자리 배열부터 업무보고 순서, 결재 순서, 기획 및 평가, 인사까지 더불어 식사나 공간관리와 같은 일상적인 조직생활 전반에서 연장자 우선주의는 강력한 생활지침이자, 조직 통제방안이 된다.


나이에 따른 위계문화는 조직 내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 및 합리적 조직원칙의 확립을 어렵게 한다. 결과적으로, 나이주의의 병태는 나이가 젊고 연차가 낮은 노동자가 그 조직의 업무를 과중하게 수행하는 현실을 낳는다. 대개 독박쓰는 노동자는 확률상 연령이 낮은 비혼 여성이거나 자녀가 없는 기혼여성일 가능성이 높다.




위계적인 조직에서 팀장의 역할


이러한 상황에서 팀장은 스스로 그 조직의 위계를 일부 분담하여 수행하는 중간관리자로써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평직원들의 의견의 전달자이자 중간 소통창구로써 순기능도 하지만, 한편 통제되지 않는 위계 구조를 적절히 유지하거나 보완하는 애매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를테면, 팀장은 결정된 업무를 배분하고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방안을 고민하지만, 그 결정된 업무가 전체 조직의 미션과 업무역량에 현실적으로 적합한가하는 결정에서는 한발 물러나 있다. 때때로 '결정된 업무'가 사실은 조직의 미션과 현실적 조건에서 후순위가 아니라는 개인적 판단이 있더라도, 현 구조 내에서 순응하고 이를 적절히 수행해야 하는 고충을 겪는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스스로 조직 내의 자유로운 토의를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팀장 스스로 연장자 우선적인 문화, 나이주의에 따른 조직문화를 유지하는 측면이 있고 그 스스로도 나이 위계 속에서 의사소통해야 하는 조건 속에 놓인다. 기존의 조직문화가 가지고 있는 (1)통제되지 않는 위계 (2)나이에 따른 위계의 재생산에 대해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중간자로써의 딜레마에 빠진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나는 팀장이 되고 나서 이전 일 경험과는 다른 고뇌와 번민에 빠진다. 팀장이라면 마땅히 조직 일에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긍정적인 스탠스에서 판단해야한다는 압력에서부터 나이 어린 팀장을 어떻게 호칭하고 그 팀원의 나이는 어느정도가 적절한가?하는 논의들까지 말이다. 기존 질서 유지 측면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요구 받기도 하고 나이 위계를 견고하게 하는 상황들을 낯설게 마주하고 있다. <장시간 노동 권하는 '죽은 노동의 사회'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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