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간의 서울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한가한 생활을 하고 있다. 집을 떠나는 것을 여행이라고 할 때, 여행에는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 내가 최근 들어 가장 많이 느끼는 장점은, 여행이 일상을 더욱 소중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일주일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쳐다보기만 해도 예쁘다. 그동안 밀린 스킨십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자꾸 아이를 끌어당겨 품에 안는다. 볼을 쓰다듬고 나란히 앉아서 다리도 만지작거린다. 이쯤되면 아이들도 엄마가 일시적으로 한결 부드러워지고 애정이 넘치는 상태라는 걸 짐작할 것 같다.
남편한테도 왠만하면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사실 잔소리를 해봤자 소용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동반사적으로 하는 잔소리들이 있었다.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말들도 거의 하지 않는다. 내가 없는 동안 아이들을 잘 돌봐주고 내 편이라는 걸 느끼게 해준 남편한테 마냥 고마울 뿐이다.
일주일의 여행 기간 동안,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 하나는 '007 카지노 로얄'이고 다른 하나는 '예스터데이'다. 07 카지노 로얄은 호텔 방에서 보았는데, 아무 생각없이 TV를 돌리다가 얻어걸린 영화다. 007 영화를 보는 것이 거의 10년만이던가? 15년만이던가? 어쩌면 20년도 더 넘었는지도 모른다. 중학교때 단체관람 외에는 007 시리즈를 보지 않았던 것 같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새 본드로 등장했는데.. 처음엔 푸틴 같은 이미지여서 안티가 많았다고 한다. 나도 처음엔 뭔가 제임스 본드 이미지에 안 맞는다는 느낌을 가지고 영화를 봤는데 나중에는 느끼하지 않아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주인공 '에바 그린'은 내가 지금까지 본 본드걸 중 가장 압도적인 미모였다. 아니.. 최근 10년간 본 모든 여배우들 중에서 미모 면에서는 원탑이라고나 할까. 우아한 기품이 넘치는 본드걸이라니.. 뭔가 어울리지는 않지만.. 원작의 설정상 제임스 본드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이 여자를 잃고 나서 우리가 아는 바람둥이, 내지는 냉소적인 스파이가 되었다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여주인공의 미모와 현실감 있는 액션, 한층 커진 스케일에 눈을 떼지 못하고 집중해서 보았다.
'예스터데이'는 중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본 영화다. 이 영화도 정말 '시간 때우기' 용으로 아무 생각없이 보게 되었는데 독특한 설정에 나도 모르게 몰입해서 '혹시 영화를 다 보기 전에 비행기가 착륙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불안감을 느끼며 정신없이 보았다. 중반 이후부터 눈물도 여러번 흘렸다. 옆 자리에 앉는 승객이 볼까봐 창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보니 제작사가 '워킹타이틀'이다. 워킹타이틀이라면 그 유명한 '러브 액츄얼리', '노팅힐',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등의 걸작을 무수히 배출한 로맨스 영화의 명가가 아닌가? 남자 주인공의 어색한 연기나 표정만 아니었다면 훨씬 더 좋았겠지만, 영화 전반에 울려퍼지는 비틀즈의 노래만으로도 1시간 반이라는 시간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나중에 주인공이 살아 있는 존 레논을 찾아가는 장면은 감동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평범하지만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존 레논이라니. 그 자체로 울컥하게 만든다.
존 레논이 살아있을 때 그에게 '전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지지만 짧은 인생을 사는 것'과 '아무도 모르지만 길고 행복하고 충만한 인생을 마치는 것'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면, 그는 과연 어떤 것을 선택했을까?
이미 고인이 되었기에 그 답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죽은 존 레논이 영화 속에 노인의 모습으로 소환됨으로써, 마치 그가 행복하고 평범한 여생을 누리다 간 것 같은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런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 어쩌면... 아니 거의 확신한다.
행복은 평범한 일상과 아련한 꿈의 중간지대, 그 불분명하고 모호한 경계에 있다는 것을. 꿈에 다가감으로써 행복할지, 일상에서 행복할지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다행스런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에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