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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라이 Aug 21. 2018

어떻게 자식에서 부모가 되는가

'자식은 부모를 생각하지 않는다!'


몇 년 전에 내가 내린 결론이다.


큰 아이가 어릴 때 온 정성을 들여 아이를 키웠다. 엄마와 어린 시절에 대한 경험이 부정적이었던 나는 육아책을 쌓아놓고 고시 공부하듯이 치열하게 공부하면서 엄마 노릇을 했다. 


엄마에 대한 감정의 앙금이 남은 상태로 '내 딸은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거야. 나중에 고마워할 거야'라고 생각했다. 


'우리 엄마는 좋은 엄마야. 나는 행복한 아이야'라고 생각하겠지?' 이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그것이 완전한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엄마와 첫 아이와의 허니문이 끝나가는 지점, 그러니까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였다. 아이는 물론 지난 시절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건'에 대한 기억뿐이었다. 


예를 들어, 같이 놀러 갔던 기억은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 경험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특별한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엄마인 나뿐이었다. 


아이에게는 그저 더 어렸을 때 있었던 평범한 일상 중의 하나였다. 주어진 일상이었으니 특별히 감격할 일도, 감동할 일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아이에 대한 서운함이 쌓여갔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실망했고 속상해서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다. '큰 아이 때문에' 포기한 것들이 좀 있었기에. 사실은 아이 때문이라기보다는 '아이에 대한 내 욕심' 때문이었다. 


그것이 잘못임을 깨닫고 둘째 아이 때부터는 나의 '어떤 것'도 양보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이 아이를 위한 길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 생각도 잘못되었음을 나중에 깨달았다. 


육아는 기본적으로 엄마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희생 없는 육아는 없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쨌든 큰 아이 초등학교 졸업식 날, 그 서운함이 나만의 것이 아니며 어찌할 수 없는 인생 행로 내지는 인간의 굴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졸업 축가로 러브홀릭의 '버터플라이'가 흐르면서 졸업하는 아이들의 사진이 하나씩 스크린에 올라가는데, 차오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자연스럽게 다른 부모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눈물을 참느라 눈이 벌게 져 있었다. 


아이들 앞에서 우는 게 창피해서 죽을힘을 다해(과장이 아니다! 노래는 또 왜 그렇게 긴지!) 참다가, 결국에는 눈물을 쏟고 말았다. 나중에는 거의 모든 부모들이 폭풍 눈물을 흘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선생님들까지 이 눈물 행렬에 동참했다(그들도 교사이기 전에 부모였으므로). 


그런데 아이들은 하나같이 해맑게 웃고 끊임없이 장난을 쳤다. 우는 어른들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낄낄대기도 했다. 학교를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신나는 눈치였다.


그때 확실히 깨달았다. 


아직 '어린아이'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내가 아이들 눈에는 완벽한 기성세대이자 그저 '엄마'라는 사실을. 


내가 상상한 이상적인 엄마가 아니라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는 귀찮은 엄마'일뿐이라는 것을. 


내가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힘들여 쌓은(쌓았다고 생각한) 인격이나 수양, 지식은 간 데 없고 고리타분한 엄마만 남았다는 사실을.


이날 이후 내가 마음속으로 자주 마주치게 된 사람은 바로 '내 엄마'였다. 


'엄마는 얼마나 속상했을까?' 이 말을 마음속으로 자주 중얼거렸다.


<다음 글에 계속 이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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