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보다 오해가 빠른 공간에서

잘해주면 좋은 사람, 안 해주면 나쁜 사람 사이에서

by 밍뚜


첫 출근.


탈의장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주머니는 작은 수첩과 볼펜, 형광펜으로 금세 불룩해졌다.

가슴이 울렁였다. 긴장과 불안이 교차했다.

데이 근무는 오전 6시 30분 시작.

하지만 관례상 6시까지 스테이션에 도착해 앉아 있어야 했다.

도착하니 간호사 선생님들과, 내게 일을 알려줄 간호조무사 선생님까지 이미 모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자, 인계가 시작됐다.


6시 20분.


“참고하세요.”


간호조무사 선생님이 환자 성함, 호실, 진단명이 적힌 인계용지를 건네주셨다.

책상이 없어 무릎 위에 클립보드를 얹고, 수첩을 펼쳤다.

종이 위에 떨어지는 의료용어는 낯설고, 모양은 알겠는데 뜻은 잘 모르겠는 그런 어리둥절함이 있었다.

‘STSG… 뭐?’, ‘럼스카겔?’, ‘FTSG…?’

나는 들리는 대로 적었다.

단어는 점점 뭉개지고 흐려져서

결국 내가 쓴 문장조차 나중엔 이해할 수 없었다.

중간에 물어보고 싶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앉은 선생님께, 살짝 귓속말로라도.


'선생님, 이거 무슨 뜻인지…?'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공부 안 해온 티 낼까 봐.’

‘너무 기본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면 어쩌지.’

‘첫날부터 찍히면 어쩌지.’


혀끝까지 올라온 불안함은 결국 손을 멈추게 했다.

눈동자만 조용히 굴려 다른 사람은 어찌 쓰고 있는지 힐끔거렸다.


7시, 아침 식사 준비가 시작됐다.


침상 머리를 올리고, 베개를 받쳐드리고,

틀니는 식판 위에 올려드리고,

비어 있는 물통은 정수기로 채워왔다.

생각보다 더 세세하고 정돈된 손길이 필요한 일이었다.

아까 그 무서웠던 인계 내용은 어느새 기억에서 지워져 있었다.

호출벨이 울리면 바로 뛰어가야 했다.

해당 자리에 커튼이 쳐져 있으면 반드시 양해를 구하고 열어야 했다.

'그냥 열었다가 큰 컴플레인이 들어온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욱 조심했다.


“호출하셨어요?”

“네, 식사 다 했으니까 치워주세요.”

요청은 끊이지 않았다.


“물도 좀 떠다 주세요, 미지근한 걸로요.”

그 환자분은 혼자 거동이 가능한 분이었다.

통합병동에선 종종 이런 일이 반복됐다.


“선생님, 환자분들 요구 다 들어주면 안 돼요.”

옆에 계시던 간호조무사 선생님이 조용히 말씀하셨다.


“하실 수 있는 건 직접 하시라고 알려드려야 해요.

우리가 다 해줄 수는 없으니까요.”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 병동의 룰이기도 했다.

나는 선생님의 말처럼,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환자분, 통합병동에서는 스스로 가능하신 부분 외

호출벨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금세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어제는 잘해주더니 왜 오늘은 바뀌었냐”며

병동 스테이션까지 찾아오셔서 항의하셨고,


나는 차지 선생님께 따로 불려 갔다.


“그런 말은 더 조심스럽게 접근했어야지.

톤도 부드럽게 하고, 말하는 시점도 생각해야 하고…”


마스크 속 얼굴이 순간 얼어붙었다.

아, 내가 또 잘못했구나.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또 실수했구나.

내가 말한 의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상대가 불쾌하면, 그건 내 잘못이 됐다.

억울했다. 정말 억울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내가 아직 부족해서겠지.’

‘말을 더 잘했어야 했는데.’


부당함보다 먼저, 자책이 밀려왔다.

자책은 늘 그렇듯, 고개를 숙이게 했다.

그날 이후, 나는 말을 줄였다.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오해를 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억울하게 욕먹는 일이 너무 버거워서였다.


내가 느낀 불편함과는 별개로, 통합병동은 간호와 간병이 모두 이뤄지는 곳이다.

이미 정해진 인식을 바꾸려 들면, 문제는 더 쉽게 생겼다.

그런데도 마음속에선 계속 물음표가 맴돌았다.


TV 리모컨이 안 보여서,

창문을 열고 싶어서,

병실 커튼을 닫고 싶어서…


정말.. 그럴 때마다 호출벨을 눌러야 하는 걸까?


그럴수록 일은 밀렸다.

수술 환자 준비, 입·퇴원, 린넨 정리, 기저귀 케어, 세발 보조,

치료실 모시고 가기, 약 타기, 검체 접수…

요일마다 달라지는 업무도 빠짐없이 기억해야 했고,

그 와중에도 호출벨은 계속 울렸다. 멈추지 않았다.


근무가 끝나고 나서야, 나는 겨우 편하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선생님, 오늘 수고하셨어요.”

“아니에요… 전 선생님 따라다닌 것밖에 없어요.

잘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렇게 불편하고도 긴 하루가

조용히 끝났다.



이전 02화낯선 풍경 속, 단단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