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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숲이 되기까지

매일 뿌려진 씨앗들을 생각하며

by 진그림

아침에 나가서 보니, 일주일 전에 심어둔 씨앗들에서 작은 싹이 올라와 있다. 배추, 한밭 청치마 상추, 앤다이브, 케일.... 이름마저 예쁜 이 친구들이 잘 자라 푸릇푸릇 텃밭을 덮을 상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아직은 조심스러운 생명이지만, 손가락 두 마디쯤 자라면 이분들을 텃밭으로 옮겨 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올겨울 내내 신선한 샐러드 채소들을 식탁에 올릴 수 있게 된다.

엇갈이 배추/ 진의 텃밭

나간 김에 텃밭을 한 바퀴 돌아보니, 3주 전, 한 달 전에 심어두었던 채소들도 온도가 내려간 탓에 느리기는 해도 잘 자라고 있다. 오, 열무는 수확해서 물김치를 담글 수 있겠는데? 쌈 야채도 다 따면 한 끼는 되겠으니 저녁엔 고기를 구울까?

알타리무/ 진의 텃밭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편 126:5


이 성경 말씀이 텃밭을 하고부턴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막상 닥쳐보니 매일 무언가를 심고, 물 주고, 돌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귀찮고, 피곤하고, 때로는 나가기조차 싫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 눈물을 흘리면서도 씨를 뿌리러 나가야 하는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오늘 씨를 뿌리지 않으면, 한 두 달 뒤엔 먹을 게 하나도 없다는 경험했기 때문이다. 텅 빈 텃밭을 보며 아쉬워하고 있으면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게 뭐 했니, 씨 제때 안 뿌리고?


필요하면 언제든 슈퍼에서 쉽게 사 먹을 때는 결코 느끼지 못한 생생한 경험이었다. 지금 내가 수확하는 건 과거에 내가 뿌리고 심었던 것의 결과라는 것을, 몇 번의 계절을 지나며 알게 되었다, 또 부지런히 돌보지 않으면 애벌레에게 다 먹혀버려 그동안의 노동이 다 헛수고가 된다는 것도 가슴 쓰리게 겪어봐서 알았고. 성경 말씀이 머리가 아니라 심장과 손끝에서 깨달아지는 전율의 순간들이었다.


인생도 텃밭과 너무 닮아 있어서 깜짝깜짝 놀란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

냉정한 진리, 이 단순하고도 분명한 원칙이, 흙을 만지며 조금씩 내 삶에 스며들고 있다.

Mizuna/진의 텃밭

매일매일 끈기 있게 공부라는 씨앗을 뿌려야 좋은 성적, 원하는 결과물을 얻는 것처럼,

일도. 작은 일 하나 성실히 해내는 태도가 씨앗처럼 쌓여 결국은 신뢰가 되고 기회라는 열매를 얻게 된다.

기술은 더더욱 그렇다. 하루하루 손끝으로 익히고 반복한 것만이 나의 것이 된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떤가. 관심과 진심이라는 씨앗을 심고, 기다리고, 또 돌봐야만 우정과 신뢰라는 열매들이 맺힌다.


청갓/ 진의 텃밭

텃밭은 나의 선생님이시다,

이렇게 매일 나를 일깨워 준다.


거두고 싶은 것이 있다면,
오늘도 나가서 씨를 심어셔야 합니다.


겨울에도 풍성한 야채를 수확하고 싶은 나는 오늘도 텃밭선생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담고 씨앗을 심는다. 기쁨으로 거둘 날을 기대하면서.


당근 새싹/ 진의 텃밭
천 개의 숲은
하나의 도토리에서 시작된다.

-랄프 왈도 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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