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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의 발소리를 못 들은 텃밭은

조금만 방치되어도 행색이 꾀죄죄

by 진그림

식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다.

숲이 되어버린 바질/진의 텃밭

2주간 집을 비웠더니 바질은 몽땅 꽃이 피어버렸고( 자주 잎끝을 잘라주지 않으면 금방 꽃이 피고 시즌이 끝나버리는 특징이 있다.) 토마토는 폭탄머리된 사람처럼 잎과 줄기가 뒤엉켰고, 파드득나물은 멋대로 뻗고 수확해야 할 까만 씨들이 곧 떨어질 것 같았다. 씨 뿌려둔 상추와 갓 새싹들은 서로를 밀치며 숨 가쁘게 자라고 있었다. 대체 어디 갔었냐고 볼멘소리들을 하는 것 같다.

미안미안. 엄마 보러 갔었어. 얼른 솎아서 넓게 심어줄게.


파종과 성장기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출국 당일 아침에 당근, 상추, 시금치, 코리안다, 딜, 갓, 열무씨들을 비어있는 공간에 심어놓고, 남편에게 물 주기를 부탁하고 갔더니 싹들이 소복하게 모두 잘 자라나고 있었다.

고마워. 여보.

Mizuna가 소복히 고개를 내밀었다/진의 텃밭

엉클어진 폭탄머리 같던 토마토는

잎과 줄기를 솎아내자 아주 말끔해졌다.

공기도 잘 통하고, 영양도 열매로 집중되어 이제

잘 자랄 거다. 이제 햇볕 실컷 보게 돼서 좋지?

무성한 잎을 솎아낸 토마토/ 진의 텃밭

엉망진창으로 자란 파드득나물도

한 뭉치 잘라내어 씨앗은 털어서 받아두고,

남은 잎과 줄기는 점심상에 올리려고 다듬었다.

파드득나물/ 진의 텃밭

오크라는 스무 개나 수확했다.

낯선 채소라, 이렇게 많은 양을 어디에 쓸지

이제 알아봐야 한다.

오크라는 1미터도 넘게 크는구나/ 잔의 텃밭

오전 내내 잡초를 뽑고, 물을 주고, 손을 대고 나니

텃밭이 서서히 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잠시의 무관심이 이렇게 빠르게 드러나는 것을 보며,

삶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도, 관계도, 나 자신도

돌봄 없이 방치되면 금세 엉클어지고 메말라간다.


텃밭을 매일 돌아보듯,

내 안의 마음밭과 소중한 이들을 향해

책임감 있게 발소리를 내면서 살아야겠다.

삶은 그렇게 돌보는 것임을

오늘도 텃밭이 말없이 가르쳐준다.



넌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어.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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