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중지추(囊中之錐)
봄이다. 따스한 햇볕과 살랑이는 바람이 겨우내 얼었던 마음을 녹이며 바야흐로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다. 개인적으로 지난겨울은 너무도 춥고 힘들었다. 단순히 날씨뿐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상황과 내 마음도…. 이렇게 봄을 기다렸던 적도 없던 것 같다. 봄이 왔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겠지만 얼었던 마음이 풀렸기에 괜스레 희망이 생겼다. 지금까지는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돌아오는 계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봄은 다르다. 사람들의 힘으로 쟁취한 느낌이다(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은 그만큼이나 큰일이었다.)
마음이 풀리니 아침에 일어나면 스트레칭을 하고 밖으로 나가 봄 내음을 들이쉬게 된다. 항상 가던 길이 아닌 가보지 않은 길로 돌아가기도 한다. 걷기 좋은 날이면 으레 하는 취미다. 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잔잔한 연주곡을 들으며 낯선 풍경을 걷다 보면 어느새 낭만적인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나에겐 그것이 일탈이고 힐링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욕심이 생겼다. 이런 행복한 일탈을 일상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인생을 낭만적으로 살 수는 없을까? 아, 낭만! 이 얼마나 달콤한 단어인가. 낭만적인 인생을 산다는 것이 평생 단 것만 먹고 살겠다는 것처럼 단순하고 어리석은 생각일까?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류시화 님은 자신의 저서에 이렇게 썼다.
음식에 소금을 집어넣으면 간이 맞아 맛있게 먹을 수 있지만, 소금에 음식을 넣으면 짜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소. 인간의 욕망도 마찬가지요. 삶 속에 욕망을 넣어야지, 욕망 속에 삶을 넣으면 안 되는 법이오.
― 《지구별 여행자》, 류시화
인간적인 욕망의 범주에 속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단순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니까 무작정 낭만적인 인생을 살기로 했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그냥 낭만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하기 때문일 뿐. 낭만은 로망과 같은 단어였다. 프랑스 고어(古語)인 roman이 일본으로 넘어가 발음이 가장 가까운 한자 浪漫(ろまん, 로망)으로 쓰였고 그걸 다시 우리식 한자음대로 읽어 낭만이 되었다. 일본식 한자어이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게 좋겠지만 이미 낭만과 로망은 비슷하지만 다른 뜻이 되어 우리 문화에 정착해버렸다. 로망은 보통 이상적인 꿈이나 소망을 뜻하게 되었고, 낭만은 현실에 매이지 않는 감상적인 태도나 심리, 또는 분위기를 말한다. “낭만적인 인생이야말로 나의 로망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낭만이란 단어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내가 처음 꿈꿨던 낭만은 바로 캠퍼스의 낭만이었다. 잔디밭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기타를 튕기고 노래를 부르고, 학창 시절 때는 읽지 못했던 수능과 관계없는 다양한 책을 읽고, 친구들과 철학적인 문제에 관해 토론을 하고, 마음이 맞는 여성과 캠퍼스 커플이 되어 달콤한 사랑을 하는 대학생만이 누릴 수 있는 낭만.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 한 학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 낭만은 일장춘몽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 시대에는 그것이 가능했을지 몰라도 내 시대에 그것은 인생의 낭비와 다름없이 보였다. 그 누구도 그런 낭비를 하지 않았다.
두 번째 낭만은 군대의 낭만이었다. 고된 훈련을 같이하며 쌓아온 전우애로 서로를 의지하고 챙겨주고 격려하는 남자만의 낭만. 다행히 두 번째 낭만은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꼬인 군번(선임이 많고 후임은 들어오지 않는 군번)이었지만 동기들 덕분에 군 생활을 나름 즐겁게 보냈다.
세 번째 낭만은 직장인의 낭만이었다. 한결 여유로운 경제력으로 문화생활과 자기계발에 투자하고 다시 일에서 그 성과를 거두는 선순환. 일과 쉼의 조화를 이루는 생활을 꿈꿨지만, 그 꿈은 사치였다. 오히려 어울리지도 않는 명품을 사는 금전적 사치가 더 쉬울 듯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처럼 몇 년 악순환에 끙끙대다 어느새 현실에 적응하는 나를 발견했다.
정의를 말하면 저 혼자 잘난 사람이
예절을 말하면 고지식한 사람이
낭만을 말하면 촌스러운 사람이
진심을 말하면 나약한 사람이 되는 이 사회의 현실에
적응해가는 뿐만 아니라 더 진화해가는 내가 싫다.
- 2012년에 쓴 자조 섞인 일기 中
우리는 중요한 것이 소중한 것을 앞서는 시대를 살고 있다. 돈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이지만 결코 소중한 것은 아니다.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좇으며 살고 있는가? 과연 우리 삶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일까? 출처는 알 수 없지만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본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야기는 어느 한적한 바다에서 시작된다. 도시에서 온 부자가 해변을 거닐다 자기 배 옆에 드러누워 빈둥빈둥 놀고 있는 어부를 보고는 어처구니없어하며 말을 건다.
“이보시오, 이 금쪽같은 시간에 왜 고기잡이를 안 나가시오?”
“오늘 몫은 넉넉히 잡아 놨습니다.”
“시간이 날 때 더 잔뜩 잡아놓으면 좋잖소.”
“그래서 뭘 하게요?”
“돈을 더 벌어 큰 배 사고, 더 깊은 데로 가 더 많이 잡고, 그러면 돈을 더 벌어서 그물을 사고, 그러다 보면 나처럼 부자가 되겠지요.”
“부자가 되면 뭘 합니까?”
“아, 그렇게 되면 편안하고 한가롭게 삶을 즐길 수 있잖소.”
부자의 말에 어부가 대답했다.
“내가 지금 그러고 있잖소?"
동화 같은 이 이야기는 나에게 인생의 가장 큰 숙제를 안겨주었다. 이상과 현실. 현재와 미래. 행복과 만족.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우선순위인가를 결정하는 어려운 문제였다. 내가 볼 때 이미 낭만적인 삶을 실천에 옮긴 사람들이 있다. 여행이 좋아 세계를 돌아다니며 여행작가로 사는 사람, 음악이 좋아 음악을 만들고 부르며 사는 사람, 요리가 좋아 살던 집을 레스토랑으로 고쳐 짓고 음식을 팔며 사는 사람, 서핑이 좋아 휴양지에서 여행객들에게 서핑을 가르치며 사는 사람들이 바로 낭만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들의 삶은 타인의 부러움을 사지만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고충과 외로움이 있을지는 알 길이 없다.
낭만이란, 현실을 외면하고 이상을 좇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무언가를 찾으려는 노력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낭만가객 최백호님의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를 보면 1절은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2절은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라고 끝이 난다. 그야말로 낭만의 소중함을 말하는 노래가 아닌가 싶다. 잃어버린 것, 다시 못 올 것. 바로 지금이다.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면서도 가장 불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시간이다. 누구에게나 하루는 24시간이 주어지지만 인생이라는 시간은 모두 다르게 주어진다. 끝이 언제일지 모르는 인생에서 언제를 살아갈 것인지 선택하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또 있을까?
추억은 현실 속에 묻혀있다가도 불현듯 튀어나와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