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하철 성추행범을 잡았다.

by 스윗퍼시먼

사건이 일어났던 그날,

나는 누구보다 용감한 여전사였다.

내 엉덩이를 움켜쥐던 그놈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흔들었지만 나는 더 세게 잡았다.
내 손가락이 휘는 줄도 몰랐다.
버텼다.
그리고 소리쳤다.
“도와주세요!”


그렇게 외면하는 사람이 많을 줄은 몰랐다.
사람들은 안 들리는지 못 듣는 건지 걸음을 재촉하기 바빠 보였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나는 죽어가던 남자를 살려본 적이 있다.
소리치고 도와달라 하고 119에 전화했다.

심폐소생술을 시키고 화상으로 상황을 컨트롤하며, 살려냈던 그때부터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아마 그때부터 혼란이 왔던 것 같다.
사람을 살려봤는데,
왜 나를 아무도 살려주지 않았을까.


그날의 나는 솔직히 멋있었다.
사건 직후에도 기가 죽지 않았다.
나는 내가 경찰에 신고했고,
과학수사대까지 불렀다.
진술을 또렷하게 하고, 기록하고, 지장도 찍었다.
그때의 나는 나 자신이 놀라울 만큼 씩씩했다.


망치질하는 심장을 부여잡고 조신하게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오면서,
마치 햇살을 받으러 온 천사처럼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가볍게 툭 털어낸 줄 알았다.
그래,

나는 멋있었고, 당당했고,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서 조사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여경은 몇 번이나 안심을 시켜줬지만 나를 조사하는 것 같았다.

그때 느꼈던 엉덩이 감촉을
그 외설스러운, 소름 끼치는 촉감을
다시 설명해야 했다.
외면하는 지하철 사람들의 눈빛을 떠올리며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내 손가락이 얼마나 아팠는지
말해야 했다.

나는 진술하다가 구역질이 날 뻔했다.
그 순간의 나를 다시 입 안에 넣어 씹어야 했다.
그게 피해자의 역할이었다.
말해야 했다.
믿게 해야 했다.


이후로도 몇 개월이 지나서야 재판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피해자이자 증인으로 출석 요구를 받았다.
그 문서를 받았을 때의 기분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숨이 막혔다.
잊은 줄 알았다.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법원이 나를 다시 불렀다.
“설명해라. 증명해라.”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법정에 섰다.
피고인이 나와 마주치지 않도록 증인을 보호해 주었지만,
나는 울었다.
그러면서도 또박또박 말했다.


그렇게 증언을 마쳤는데
재판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검사가 바뀌었다. 또 바뀌었다. 세 번이나.
피고인은 시간을 끌었다.
증인이 불출석했다.
어제 공판이 끝나고 다시 기일이 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 사건 발생으로부터 1년 반이 지났다.
나는 그 시간 내내 피해자였다.
1년 반 동안 피해자였다.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닌데.
나는 단순히 끝나기를 바랐다.
나의 시간이 내 시간이 되기를.
내가 그냥 한 사람으로 돌아가기를.


그런데 재판이 나를 붙잡았다.
증명하라고 했다.
다시 말하라고 했다.
잊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
말하고 증명하고 기다리고 무너지고
또다시 일어섰다.


공판이 있는 날은 유난히 햇살이 뜨거웠다.
마치 그날처럼.
그날의 나처럼 씩씩하지도,
천사처럼 가볍지도 않았다.
그냥 한 사람.
피해자이자 증인.
그리고 또다시 기다리는 사람.

쓰면서 다 토해내면 예전으로 돌아갈 만큼 홀가분해질까?



나는 정치인이었다.
시의원으로 일하면서도 억울한 누명을 썼던 기억이 있다.
대리운전기사와의 오해.
나는 무서워서 112에 신고했는데
언론은 ‘갑질 시의원’으로 만들었다.
그때도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나는 또 증명해야 했다.
설명해야 했다.
그때의 상처가
이번 재판 내내 나를 흔들었다.


하지만 오늘 이 글을 쓰면서 깨닫는다.
이번에는
나는 침묵하지 않겠다.
두려움이 있지만,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말했다.
이 싸움이 길어졌지만
나는 내 목소리를 지켰다.


또 재판이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른다.
그날이 오면 나는 또 떨릴 거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떨 거다.
두려움보다 정의를 기대하면서 떨 거다.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증명한 사람으로.
그리고, 피해자가 아닌 나로 살기 위해서.


이 글은 그냥 내 하루의 기록이다.
나의 무서움, 나의 분노, 나의 피로,
그리고 나의 용기를 담았다.
누군가는 이 글을 보고
“나도 말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나는 오늘도 말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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