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왜 이렇게 과몰입하냐고요?

by 스윗퍼시먼

그건 살아남기 위한 반응입니다.

사건이 있고 난 뒤, 저는 말이 없어졌습니다.

표정도 줄었습니다.

눈동자엔 긴장이 고였습니다.

어떤 날은 사람 많은 전철 안에서 말없이 숨을 참았고,

어떤 날은 스스로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에 의외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그런데요.

정말, 과몰입일까요? 이건 그냥 분노가 아닙니다.이건 내 생존을 지키기 위한 반응입니다. 피해 경험 이후, 우리 몸은 바뀝니다.신경계는 더 빠르게 반응하고,

위협에 민감해지고,

‘비상벨’을 항상 ON 상태로 켜둡니다. 그리고 정신은 말합니다.“이제, 안전은 네가 책임져야 해.”

뇌는 기억을 삭제하지 않았습니다.저는 “그러다 진짜 중요한 일에서 힘 못 써. 너만 손해야” 라고 속앓이를 합니다. 하지만 뇌는 그런 걸 가려 듣지 않습니다.뇌는 단지 ‘그날’의 체험을 다시 저장할 뿐입니다. 가해자의 손 위치, 역무원이 도착했던 장면, 그 사람의 멱살잡힌 첫 표정, 사람들이 외면했던 풍경 모두 다 필름처럼 재생됩니다.원하지 않아도요. 그래서 이건 ‘과몰입’이 아니라, ‘과학’입니다.

트라우마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과잉각성(hyperarousal) 상태라고 부릅니다. 신체적으로는 숨이 짧아지고, 심리적으로는 방어가 강해지고, 인지적으로는 “위험하다”는 판단이 과잉 작동됩니다.

다시 말해, 이건 감정 문제가 아니라, 생존 본능입니다. 그런데 이 과잉각성을 사회는 ‘피해자다움’으로 조율하라고 합니다.누군가 상처받은 모습을 보이면, “정신과 좀 가보지 그래.”,

“정리 좀 하고 얘기해.”

사회는 피해자의 고통을 그저 ‘조용한 피해자’로만 상상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요?

왜 피해자가 고요해야 믿어지나요?

왜 피해자가 우아해야 설득력 있나요?

왜 피해자가 분노하면 “지나치다”는 소리를 듣나요?

그 기준이 만들어낸 건 피해자의 자기검열이고, 침묵의 루틴입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가해자에게는 여러번의 소명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법이 그렇다고 합니다.

“아시면서 그렇게 반응하면 더 이상 대화가 안 됩니다.” 실제로 들었던 말입니다.

그 한 마디가, 제 마음을 두 번 찔렀습니다.

“너처럼 반응하면”이라는 말은 내 반응이 문제라는 뜻이고,

그 사람이 문제라는 사실을 지워버리는 말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저 자신에게조차

“내가 법을 그렇게 모르나?”

“내가 피해자인데 왜 사회와 제도는 또 피해를 주나?”

“지금도 너무 예민한가?”

자문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문할 때마다, 저는 기억납니다.

그 손이 내게 어떤 침범을 했는지.

그 멱살을 잡을 때 내가 얼마나 떨렸는지.

그 모든 과정을 혼자 밟으며,

내가 얼마나 “말하지 않아도 되면 좋겠다고” 수없이 되뇌었는지를.


우리에게 “왜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라는 질문이 필요합니다.

왜, 내가 피해자임을 입증하는 데 이렇게 많은 시간과 증거와 가해자에게 소명의 기회가 필요한지?

왜, 가해자는 “실수였다”는 말 하나로 몇 번의 소명의 기회를 주는 구조인지?

왜, 피해자의 회복엔 수개월이 걸리고,

그동안 법과 사회는 아무것도 보호해주지 않는지?


그래서 이 글은 회복의 기록이자, 구조에 대한 항의입니다.

그리고 만약 겪게 된다면 “너 잘했다”고 말해주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감정이 아니라, 상식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상담 중입니다.

잠을 설치는 날도 있고, 자주 지하철 대신 걷습니다.

도무지 내가 내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를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이건 내 생존을 위한 ‘반응’입니다.

누가 뭐래도,

저는 살아남기 위해 반응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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