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 친구와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친구는 택시비를 하라며 현금 3만 원을 쥐어주었고, 저는 감사히 받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11시가 넘어 택시에서 내렸는데, 작은 트럭을 놓고 참외를 팔고 있는 할아버지가 계셨어요. 11시가 넘었는데도 트럭에 참외는 한 가득이었고, 봉지로 담아진 참외들이 그득했죠. 마침 현금도 있었기에 사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참외를 무척 좋아하시거든요.
오천 원 어치를 사려다 그냥 만 원어치를 달라고 했을 때, 할아버지는 꽤 기뻐하셨고, 저도 꽤 기분이 좋았습니다. (간신히 연명하며 스타트업을 할 때는 느껴보지 못한 행복!) 하지만, 참외의 상품 가치는 만 원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실은 그게 걱정되어서 어머니께 드리면서 몇 번이나 참외 괜찮냐고 물어봤어요. (과일 품질 같은 거 모르는 참 IT인!)
그리고 며칠 뒤, 주말에 어머니는 참외를 더 드시고 싶다고 하셨고, 참외를 사러 갔습니다. 저희 집은 대형 마트와 재래시장이 마주 보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참외를 살 수 있는 곳은 꽤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에게서 샀던 참외만큼 좋은 참외를 찾지 못하고 결국 그냥 돌아왔습니다. 가격에 비해 참외가 좋지 못하다고 어머니는 말하셨습니다. 저번에 참외 참 좋았는데.라는 이야기도 덧붙이시며.
IT 이야기, 서비스 이야기를 기대하셨을 텐데, 난데없이 참외 이야기라니 조금 당황스러우셨죠? 실은 제가 몇 년 전에 결제 앱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저는 오로지 신용카드를 이길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었어요. 한국은 포스기가 매우 잘 보급된 나라로 핸드폰 결제 사용률은 의외로 낮아요. 신용카드의 UX를 아직은 핸드폰 앱이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당장 저만해도, 신용카드를 건네는 게 더 편하거든요.
그런데 참외를 사고 나서, 어머니와 시장을 돌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가 현금을 제게 쥐어주지 않았다면(현금을 들고 다니지 않는 참 IT인!), 저는 참외를 못 샀을 것이고, 할아버지도 참외를 팔지 못하셨겠지요. 제가 꿈꾸던 결제 앱의 세상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그때 당시에는 신용카드에서도 소외받는 사람들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요.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는 없다는 것을요. 마치 공리주의자처럼 다수를 위해서 소수가 희생될 수 있음을 압니다. 전체 총량의 행복이 증가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것도 압니다. 하지만, 자기가 만든 서비스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례로 타다와 전 이재웅 대표를 들고 싶습니다. 꽤 시간이 흐른 이야기입니다만 이 기조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 예상합니다.
타다를 전적으로 응원하기 힘든 이유
이재웅 전 대표는 택시 시장의 1%, 서울시 택시 매출액의 2% 일뿐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비율로, 힘의 크기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입장에 놓여보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기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IT는 거대한 흐름으로 택시 시장을 비켜가지는 않겠죠. 상생의 길을 찾으며 협의를 해나가는 것과 숫자와 비율로 별 일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지 않을까 싶어요. 저 기사를 처음 접했을 때, 올바른 관점으로 타다를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는 게 참으로 기뻤어요.
신용카드와 핸드폰 결제는 물론 사람을 편하게 하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비가역성을 주는 좋은 서비스임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고려하지 못한 사람들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을 비판할 때는 쉽게 했지만, 자신도 그랬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사실 준비하고 있던 글은 Ai가 사람을 대체해서는 안되고, 사람을 돕고 행복하게 하는 일에만 쓰여야 한다는 글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참외 이야기는 브런치 시작할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긴 한데, 접은 소재였지요. 저는 회사에서 ATS(Applicant Tracking Systems 지원자 추적 시스템 : 이력서를 요약하고, 지원 경로를 추적하는 채용 시스템)의 기획자인데, 어떻게 하면 Ai가 적당히 도움만 주고, 사람이 사람을 뽑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75%의 지원자를 알고리즘으로 거른다는 것이 저는 납득이 되지 않아요.
로봇이 아니라 서비스를 만든다는 배달의 민족이나, Ai로 고 김광석 씨의 목소리를 복원해 새로운 음반이 나온다는 예는 로봇과 Ai가 사람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돕는 좋은 예들이 되겠죠. 그러다 문뜩 이것이 Ai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참외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저도 마찬가지로 사람에 대한 관심을 적게 하며 일했구나 라는 반성을 다시 하게 됐죠. (참된) IT인으로 사람의 삶을 개선하고, 도움을 주는 일을 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하지만 가끔은 정말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서비스를 만들고 있는지 의문을 가지곤 합니다. (네가 좋은 서비스를 못 만들어봐서 그래)
그냥,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서비스는 사람에게 정말 도움을 주고 있는지, 혹은 되려 사람을 소외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말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정 지으며, '그건 어쩔 수 없지 뭐'라고 받아들이는 IT인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좋은 서비스를 만드는 것과 그 과정을 사랑하는 것, 혹은 성장과 지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어두운 이면에 대한 이야기를 고백하고, 상생을 고민하는 흔적이 서비스에 묻어나면, 녹아들면 좋겠어요. IT인에게 인문학이 왜 중요한가도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 중 하나예요. 역사 이래로 항상 인문학은 중요했지만 현대인들에게 인문학은 그냥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에 머물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굉장히 인간적인 사람 같지만 현실은 배려 없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음. 결과를 도외시한다면 대학이나 연구소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적당히'의 문제.)
이 글을 점심시간에 짬 내서 3일째 쓰고 있었는데, 어제 회사에 공유된 이벤트가 또 슬펐어요.
BBQ x 채널A x 잡다 청년 창업 지원
치킨집 창업에 역량검사 Ai... 너무 슬픕니다. 사실, 이것이 왜 슬픈가 설명해야 하는 이 현실 자체가 너무 슬퍼요. 이걸 설명하기 위해 인간만 자유로운 존재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졌어요. Ai는 사람을 도와야 하는 존재이지, 사람을 평가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거 같아요. 저는 이걸 '존재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이걸 바람(외도, 불륜... 의도치 않게 치고 들어오는 개념)으로 설명할 거예요. (인간만 자유로운 존재라 바람을 피워도 된다는 무책임한 이야기를 기대하면 어마 무시한 실망을 겪게 됩니다!) 중간에 세이브 원고(네가 그런 게 필요할 만큼 대단한 작가야? 아니 하루 조회 수에 민감한 관종이라...)가 섞일지도 모르겠네요!
PS.
참외 이야기를 결제 앱을 같이 만들던 친구, 택시비를 쥐여 주던 친구에게 했었습니다. 택시비를 쥐여 주던 친구가 그러더군요. 요즘 종로에서 껌을 파시는 할머니도 신용카드 결제기를 들고 다닌다고. 그러니까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하하 결제 앱을 같이 만들던 친구와 그냥 같이 웃었는데, 시대의 흐름(메가 트렌드)은 당연히 그런 것이고 어쩌면 정말로 걱정할 필요가 없는 문제일지도 모르죠. (어차피 결제 앱은 그만뒀고,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