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포세대라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에필로그 - 하루는 사계절, 사계절은 하루

by 스토리텔러

저는 88만 원 세대이자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입니다.

삼포세대란 말이 나오기 아주 오래전부터

아주 어린 나이부터 저는 삼포였습니다.

시대와 세대를 거창하게 논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제 입장이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일 겁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삼포세대여도

내 후배들에게 내 조카들에게

삼포세대를 물려주긴 싫었습니다.


그런 대한민국을 내가 만든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변명도 하기 싫었습니다.

그냥 세상에 맞춰 살라는 어른이 되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근래엔 그런 것 따위 어찌 됐든 무슨 상관인가 싶습니다.

연애, 결혼, 육아를 포기한다고 바뀔 만큼

세상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아예 시작점에 놓을 수 없는 사랑이야기였기에,

구질구질하고 찌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지 않을 이유는 넘쳤지만,

사랑해야 할 논리적인 이유 따윈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이유를 찾지 못하고

마침내, 기어코 수십 번의 계절이 흘러버렸습니다.


그녀에게 전해지지도

혹은 알아보지도 못하겠지만

어찌나 부끄러운지 쓰고 지우길

몇 번씩 반복하며 써 내려갑니다.


그녀와의 첫 만남,

그녀를 사랑하게 된 계기… 중요하죠.

그러나 삼포세대인 저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연애, 결혼 그리고 육아는

사랑과 또 다른 것이니까요.

연애, 결혼, 육아를 포기해도

그녀를 사랑할 수는 있는 거니까.


그러나 그녀를 갖고 싶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독점하고 싶었습니다.

누군가의 여자로 살 그녀는ㅡ

상상하기 싫었습니다.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 몸 건사하기 힘든 제가,

세상에 작은 변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제가,

그녀까지 원하는 것은

그저 소유욕이고 욕심일 뿐이지

사랑은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단지 너무 외로워서

단지 삶이 힘겨워서

그녀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그녀에게 기대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내 이기심이

그녀를 상처 입힐까 두려웠습니다.

내 이기심으로 그녀를 괴롭히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도 몰래 수 천, 수만 번

입 밖으로 던져진 그녀의 이름과

그 이름으로 일렁이는 마음은

사랑한다는 말로 밖에 표현이 안됐습니다.

무심코 던져진 그녀의 이름 뒤로

꼭 붙여보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이윽고 전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마침내 너무 어렵단 걸 깨달았습니다.


그녀가 예뻐 보여도, 가지고 싶어도,

그녀에게서 구원을 느끼는 순간조차

저는 초라하면서도 자존심만 드센 사내였습니다.

당당하게 사랑한다고 말하기엔 초라했고,

당신에게 사랑해달라 조르기엔 뻣뻣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를 바람처럼 여기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수십 계절을 넘는 바람이더이다.

수십 계절이 넘도록 간직할,

간절한 바람이 더이다.


지나간 사랑,

이젠 한 마디로 줄일 법도 하건만

여전히 서툴러 길고 구차합니다.


사랑한다는 확신을 어렵사리 얻었다 해도

수십 번의 계절은 사랑한다는 말이

사랑했다는 말로 바뀌기 충분한 시간이니까요.


그러나 여전히 ㅡ

누군가의 여자로 살지도 모를

그녀의 오늘과 내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저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갑작스럽게 핸드폰이 고장났던 날

제 핸드폰에는 다섯 장의 사진 밖에 없었습니다.

부모님 사진 세 장과 은행 보안카드 한 장,

그리고 그녀의 사진.


누구라도 그 친구처럼 물었을겁니다.

여자친구냐ㅡ, 썸녀냐ㅡ

그러나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던 날,

저는 또다시 그녀의 이름만 불렀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차마,

덧붙이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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