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억새의 계절

서른하나 가을 어느 날

by 스토리텔러

또다시 억새의 계절입니다.

당신을 그리던 이 억새밭이 그리웠습니다.

다만 이 억새밭이 그리웠습니다.


이곳을 스치던 바람,

가슴 타는듯한 저녁노을,

이곳에서의 소주 한 잔,

그리고 당신을 그리던 시간이 그리웠습니다.


당신을 그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코 당신을 그린 것은 아닙니다.

나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는지 잘 모릅니다.

내가 아는 사랑과

내가 하는 사랑은 너무 달라서.


이제와 고백컨데,

당신을 사랑한다 인정할 용기가 없습니다.

당신을 사랑한다 인정하려면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합니까.


당신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나를 인정하고,

나보다 당신에게 어울릴 남자도 인정해야 할 것이며,

그 모든 걸 인정하면서도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도 인정하고,

또한 당신을 위해 살아야 할 나 역시 인정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을 인정하고 나서야

당신에게 나를 바쳐 사랑해 달라 졸라야 할 것입니다.

나는 그것들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내가 너무 소중해서, 당신보다 내가 훨씬 더 소중해서,

거짓으로라도 나를 바쳐 당신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있는 힘껏 사랑을 부정해

고작 스스로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까.

고작 이런 것을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당신을 그리지 않고

이렇게 이 억새밭에 서는 것입니다.

이 계절을 고작 수십 번만 견디면

나도 당신도 억새처럼 하얗게 지세겠지요.

그때쯤엔 당신으로 지새우는 밤 없지 않겠습니까.

그때쯤엔 당신도, 사랑도

우습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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