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보기로 했어요, 해변

관계의 수평선

by 스토리텔러

"사랑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해변을 걷는 것이다"


나란히 걷던 여자가 갑작스레 말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다.

여자의 말에 남자는 여자의 눈을 바라봤다.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 남자와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들어본 말이에요?"


남자는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웠지만,

여자와 손을 잡고 해변을 걷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게 사랑이라는 걸, 반박할 수 없다.


남자는 대답보다

여자에게 계속 말해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남자는요. 어린아이예요.

아이에게 새 사탕을 주면,

아이는 자기 손에 쥔 사탕을 놓고,

새 사탕을 쥐어요."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좋은 거 아니에요?

어른은 욕심이 많아서,

자기 손에 쥐어진 사탕을 놓지 않으려 하니까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어쩌면 아이가 어른보다 현명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게 사탕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의 손이란 게 문제죠."


어쩌면 무서운 비유일지 모른다.

그래서 남자는 대답하기 어려웠다.


"아..."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놓고,

별을 따려고 폴짝폴짝 뛰어요.

그게 꿈, 출세와 승진, 돈... 이런 것들 이겠죠."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놓고,

다른 여자의 손을 잡는다는 무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여자는요.

부딪히는 파도에 해져요.

남자가 다시 손을 잡아주길 기다리면서

현실에 파도에 부딪치며 낡아가죠.

그게 현실적인 압박, 육아,

남자처럼 마찬가지로 출세와 승진... 이런 것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걸 지탱하는 건 우리의 관계예요.

그게 이어지지 않으면...

파도에 해어지다, 결국 헤어지는 거겠죠."


남자는 사랑을 용인이라 말했다.

얼마나 잔인한 말이었던가.

관계의 용인, 감정의 용인이라는 부분에서,

남자가 입에 올릴 수 있는 말이었을까.

파도에 해어지는 여자 앞에

남자가 용인을 입에 담는 것은,

경솔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당신의 호의는... 당신의 배려는 항상 좋았어요.

하지만 당신도 언젠가 내 손을 놓고 별을 향해 뛰어오를까 겁났어요.

손을 잡기 시작하면, 서로를 보지 않는 건 당연하지만

자꾸 손을 놓는걸 저는 견딜 수 없을 거 같았거든요."


"... 그래서 내 사랑을 사지 않을 건가요?

내가 노력하겠다고 말해도, 믿지 않는 건가요?"


남자는 여자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여자의 논리에 처음으로 수긍하는 순간일 수 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은 계속 노력했고,

흔들리지 않는 진심을 말했죠.

그래서 한번 걸어보기로 했어요, 해변."


남자는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기분이었고,

심장은 지구를 두 번쯤 내달렸지만,

최대한 정중히, 진심을 담아 말했다.


"... 당신의 손, 절대 놓지 않을게요."


남자는 근거 없는, 진심뿐인 약속을 하지 않겠다고 했었지만,

요동치는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갔다.

여자도 그걸 알아채고, 웃었다.


"남자들은 그렇게 말해요. 알아요 그거 진심인 거.

여자들은 그걸 널 이렇게 많이 사랑해!로 오해하지만,

사실 남자들은 그게 진심이란 걸 이제는 알아요."


여자는 숨을 한 번 골랐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잖아요?

그리고 말하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네 그래요. 동의해요.

삭막한 현실에 가끔은 손을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이, 있을 수 있겠죠."


남자는 여자의 말이 전적으로 동의했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거니까.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로또를 사는 사람이 있을까.


"그럼 내가 노력해야 하는 건 어떤 걸까요?"


그러나 남자는 노력하고 싶다.

그녀이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기적 앞에

어떤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 거니까.


"우리, 시선을 맞춰요.

넘치는 사랑과 헌신을 바라지 않아요.

가끔은 그게 좋을지도 모르고, 그걸 바라는 순간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자는 잠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다,

다시 남자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남자는 별을 바라보고, 여자는 자신에게 부딪히는 파도를 바라보죠.

하지만 우리는 같이 걷고 있잖아요?

손을 놓고 너무 멀리 뛰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손을 놓은 순간에도, 다시 만날 수 있게

우리가 어디를 향해가고 있는지, 목적지를 정해요.

하늘과 파도가 닿아있는, 수평선 어디쯤이 되겠죠."


여자는 남자의 눈동자 속에 비치는 자신이 보였다.

이제 나와 당신을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있을까?

설령 헤어지더라도, 님이 남이 될 수는 없다.

남보다 못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리고 가끔, 우리 서로를 바라봐요.

나를, 당신을 보는 게 아니라,

당신에게 넘겨준 나와, 나에게 닿은 당신을.

우리가 함께하며 걸었던 시간들을.

우리 얼굴에 주름살은 늘어나겠지만,

함께 걸어왔던 시간들의 증거겠지요."


여자는 환하게 웃었다.

이 순간 여자를,

여신이라 말해도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으리라.


"그렇게, 우리 함께 걸어봐요."


여자는 손을 내밀었고,

남자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단하게 여자의 손을 잡았다.

남자는 요동치는 심장을 숨기려는 듯, 농담처럼 말했다.


"늘어나는 주름살을 열심히 세어줄게요.

주름살이 늘어나도, 가끔 얼굴을 보며 웃어줄게요."


이런 순간조차 농담을 하는 남자가 싫지 않다는 게 문제다.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약속과 무엇이 다를까.

농담에 담긴 진심을 잘 알지만,


"주름살을 열심히 셀 필요 없어요!"


짐짓 모르는척한다.

그 주름살은 우리가 걸어온 시간들일게다.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남자는 구태여 말하지 않았지만,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이해했다.

이해하고 싶지 않다던 여자는 이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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