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의 다섯 번째 표현?
"계약서라도 준비할까요?"
남자의 갑작스러운 말에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자의 화법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알 수 없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매번 뜬금없지만 이번에는 진짜 모르겠네요."
남자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남자란, 여자 앞에 애정을 요구하는 슬픈 짐승일지도.
"전에 기다린다고 큰소리쳤는데요.
저 못 기다리겠어요. 계약서 어때요?
요즘 유행하는 계약연애,
우리식으론 사랑 환불 계약서.
원하시는 사항은 맞춰 드릴게"
여자는 짐짓, 비난하듯 말했다.
"큰소리치시더니...
너무 태세전환이 빠른데요?"
남자는 더더욱 슬픈 표정을 연기했다.
"나무꾼이 선녀의 날개옷 훔칠 때,
선녀의 입장을 생각했던가요?"
여자는 농담임을 알면서도,
한껏 질색하는 척했다.
"... 그거 알아요? 가끔 무서운 거?"
"환불 계약서보다는 안 무서운 거 같은데요!"
"누가 들으면 진짜 계약연애라고 오해하겠어요!
계약 연애 말고 연애미수 아니었어요, 우리?"
남자는 한껏, 아쉬운 척했다.
"아이참 저번에 거절하는 게 아니었는데..."
"고백한 적도 없거든요!
생각해 보니까 난 고백도 안 했는데, 차였더라고요?"
이런 점이,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능글맞게 말했다.
"에이, 본인도 고백 전에 거절하셨으면서 뭘...
0고백 1차임의 고통을 같이 알게 됐으니까...
쌤쌤하죠."
여자는 사실 꽤나 미안한 일이었지만,
괜시리 어긋장을 내본다.
"어머, 은근히 계산적인 거 같아.
사랑은 등가 교환이다라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넘치는 사랑과 헌신은 원하지 않는다면서요?"
농담이 오가지만,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확인하는
이 순간이 즐거운 것이다.
"음... 넘치는 사랑과 헌신이 싫지만은 않죠.
넘치는 헌신을 하곤,
그걸 대가로 요구받는 게 싫은 게 아닐까요?
자기가 좋아서 해놓고, 제게 대가를 원하는 건 이상해요.
그게 사랑도 아닌 거 같고."
여자는 이야기하며 깨달았다.
넘치는 사랑과 헌신이 싫지만은 않았다는 걸.
하지만...
"넘치게 받는 것도, 넘치게 주는 것도,
대가를 요구하는 것도...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남자는 사랑을 이거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여자가 원하는 사랑이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럼 어떻게 균형을 맞춰야 할까요?"
여자도 남자처럼,
농담하듯 진심을 말했다.
"우리의 관계가 변하지 않을 거라는 지속적인 확신이요."
남자는 의아했다.
자신은 노력하고 있었으므로.
"제가...
그렇게도 확신을 주지 못했던가요?"
여자는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과격하지만, 남자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
"의도하지 않는 혼전임신을 했을 때,
여자들이 남자에게 기대하는 답변이 뭘까요?"
남자는 잠깐 놀랐지만,
그렇게 특별한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흔하다면 흔한 일이니까.
친구들끼리도 이야기해 봤던 주제기도하고.
"음... 내가 책임지겠다?"
"남자들은 그게 가장 좋은 답변이라고 착각하는 거 같아요.
자기가 책임지면 된다.
하지만 결론을 내려달라는 게 아니에요.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에요.
선택도 누가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는 거죠.
하지만 그전에,
우리의 관계가 변할 수 있다는 게 문제라는 걸
남자들은 잘 모르더라고요."
남자는 충격에 빠졌다.
남자란 얼마나 진화를 거쳐야
여자와 같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가.
어쩌면 남자란 생물은 몇 대에 걸친 진화를 겪더라도,
여자와 같은 관점에 놓일 수 없을지 모른다.
임신이라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바라보는 관점, 시야 자체가 다른 것이다.
"아... 그렇네요.
내가 이 관계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말하면서도...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겠네요."
남자가 큰 충격에 빠지는 것을 본 여자는
남자에게 받던 배려를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계약 연애 같은 건 거절입니다!"
남자는
자신이 아직도 너무 남자라는 사실에
작은 좌절과 고뇌에 빠졌다.
하지만 고뇌에 빠지기보다,
여자의 배려에 감사하며,
괜히 삐진 척 농담을 받아쳤다.
"... 계약 연애가 차라리 쉬울 거 같아."
여자는 남자가 쉽게 빠져나오는 것 같아 안도했다.
남자의 배려를 생각하며, 농담조를 이었다.
차라리 자신을 놀리길 바라며.
"거절한 사람이 할 이야긴 아닌 거 같은데요?"
"사랑은 환불 안되지만...
거절은 환불해도 될 거 같은데요?"
여자는 발끈하는 척했다.
"애초에 고백은 안 했거든요!"
"아이 그럼 고백 두 번 받아야 하네!"
차라리 자신을 놀리길 바랐지만,
정말 자신을 놀리고 있으니,
조금 어이가 없다.
"아직도 1고백 1거절 이야기에요?
평생 연애 못하시겠네"
"사랑은 등가교환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한 번으로 용서해 드릴게요. 세일 중이니까 빨리 해보세요."
여자는 괜시리 화를 내본다.
"환불도 안 되는 상품을 세일이라고 함부로 사면 안되죠!"
남자도 질세라 화를 연기해 본다.
"그럼 언제 살 건데요!"
언제? 그렇다.
여자는 이제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남자의 배려에 기대 연애를 시작하는 건,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치사했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평소 같은 별거 아닌 농담이었지만,
뻘게진 얼굴로 대답했다. 최선을 다해.
"... 하는 거 봐서?"
여자의 표현에 되려 남자가 당황했다.
사기는 산다는 거잖은가.
"... 얌전히 기다릴게요..."
남자는 농담도 못하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이렇게 날뛰는 마음으로
얌전히 기다리겠다고 말했으니,
거짓말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