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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작 Aug 02. 2022

다치면 생각. 나는 사람.

아.무.나

매사에 신중하고 침착한 편이기에 크게 다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생각해보니, 아닌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넘어지거나 부딪히거나, 긁히거나, 다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돌아가며 다쳤었다. 순수하던 시절에는 옆에 계신 따뜻한 엄마의 약이라도 있었지. 지금 다치면 '답도 없다.'라는 말이 서슴없이 나온다. 물론 답은 있다. 내 발로 약 사 먹고 내 발로 약 바르면 되는 것.

'답도 없다.'는 말이 정말 답이 없어서 하는 말이 아니지 않은가. 답안지는 있는데 문제풀이가 없다랄까?


비가 오면 샌들을 신거나 슬리퍼를 신는다. 오늘은 비가 왔다. 고로 나는 슬리퍼를 신었다.

잠시 후 이게 얼마나 큰 패착이었는지 알게 된다.


기분 좋게 62번째 헌혈을 하러 가는 길 땅바닥이 상당히 미끄럽다는 게 느껴졌다. '오늘은 조심해야지'라는 생각과 동시에 살짝 미끄러졌지만, 엄청난 운동 신경으로 자연스럽게 중심을 잡았다. 내심 아찔했으나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이걸 넘어지지 않고 버티다니. (칭찬한다.)


한 번씩 다칠 때마다 생각을 한다. 어떻게 다친 건지, 무엇을 잘 못한 건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누워서 곰곰이 생각한다. 허무할 순 있지만 모두의 예상대로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누워서 생각해서 그런가 보다. 고민은 가급적 앉거나 서서하는 걸로. 허나 생각해야만 한다. 그나마 생각을 했기에 지금까지 온전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 수도.


나는 신중하고 침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가끔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오늘은 단단히 헷갈렸나 보다.

볼일을 다 보고 집으로 걸어 올라가는 길에 최근 꽂혀있는 초코쏙녹차팝콘을 사러 집 앞 편의점에 들어갔다.

단 돈 1500원의 행복이 사람을 이렇게 들뜨게 한다. 계산대에 앞에서 다른 맛 팝콘을 얹어주시면서


이벤트 기간이라 1+1이에요.



이럴 수가... 역시 착하게 살아야 한다.


신나게 팝콘을 2개 들고 문을 나섰다. 집이 바로 앞이었기에 가방에 넣지 않고 양손 가득 품고 우산을 펼쳤다. 계단을 밟는 순간.


'어? 뭐지? 미끄럽네?'


우두 두두두두두두두두둑-


그렇다. 빠른 속도로 계단을 밟았지만 밟지 않은 듯하게 뒤로 넘어지면서 미끄럼틀 타듯 내려온 것이다.

슬리퍼는 도로까지 날아갔고 아래에 있던 아저씨 두 분이 허겁지겁 올라와서 일으켜 세워주셨다.


'어? 뭐지? 아픈데?'


창피하면 안 아프다는 건 인류학에서 가장 손쉽게 찾아낸 논리 중 하나 일 것이다. 그건 그 순간 나에게도 적용되었다. 영화 같았다. 고개가 뒤로 넘어가는 순간 하늘이 하얗게 천천히 보였다. 일어나서 보니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팝콘 2개와 핸드폰 그리고 지갑은 내 품에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다. 넘어지는 순간에도 지켰다.

대단하지 않은가. (칭찬한다.)





대단하지 않다. 이건 칭찬하고 싶었는데 팔꿈치가 그러더라.


웃음이 나오냐?



팔꿈치, 허리, 머리 순으로 떨어진 탓에 가장 충격이 컸던 건 팔꿈치였다. 부랴부랴 집으로 올라와 거울을 보며 상태 점검을 했다. 약간의 통증이 있었지만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 내 몸을 굳게 믿었다.

샤워를 하고 나니, 급속도로 통증이 오더니 팔을 굽힐 때마다 아프더라. 친한 친구들에게 이런 상황들을 설명하지 일단 얼음찜질을 하라고 하기에 냉장고에 얼음을 비닐에 담아 팔꿈치에 대고 있는 사진을 보내줬더니, 수건이나 손수건으로 고정을 하라고 했다.


며칠 전 지하철에서 혼자 붕대를 감고 있던 내 또래 청년에게 연락하고 싶었다. 그때 내가 붕대 감아줬으니까 이것 좀 묶어주면 안 될까요...?

에휴...

끙끙- 거리다 한숨이 나왔다. 이거 하나 묶어 줄 사람이 하나 없다니.


여기서는 아무나 있었으면 했다. 다치면 생각 나는 사람.

 

아. 무. 나.


다치면 생각을 하는 나는 사람이거늘 다치면 생각나는 사람 하나 없다니.


순간 떠오른 아이디어 하나.

양말을 잘라 얼음 봉지를 고정시켰다. 순간 웃음이 나오더라. 나 천재인가?(칭찬한다)

굿 아이디어...어...?...아프다...



초코쏙녹차팝콘으로 치료할 예정이다.



(광고아님...그냥 요즘 꽂힌 팝콘일뿐.)


비도 오고
팝콘 먹을 생각에 흥분했었나 봐.
널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야.
미안해 팔꿈치야.
너도 먹어보면 알 거야. 초코 쏙 녹차팝...
아니다...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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