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시간이 필요해
큰 나무가 옅은 바람에 흩날린다. 그리고 힘겹게 버티고 있는 나뭇잎들이 서로 부비적 거리며 안간힘을 쓰는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그 간절함을 모르는 나에게는 그저 적막한 겨울날의 운치 있는 모습과 하모니 일뿐.
큰 나무를 뒤로 한채 다시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나무에게 나는 그저 쓸쓸한 겨울날의 정착하지 못한 작은 인간일 뿐. 소복소복 쌓인 눈 위에 왔다 갔노라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 가는 발소리와 동행하며 저 멀리 흐려진다.
한해 대부분의 공연을 찾아와 주신 분에게도 진심 어린 감사를.
지방 멀리서도 올라와 공연을 보러 와 준 잊혀지고 있던 동창에게도 고마움을.
추운 날 발걸음 해주신 오랜 친구와 동료들에게도 감사를.
언제나 응원해주시는 모든 분들에게도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하며...
그렇게 2022년이 마무리가 되어 가는 듯했다.
공연의 클라이맥스에 쉼 없이 추는 안무가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흐르던 음향이 내려가고 고요한 무대 위에서는 나의 숨소리만 들려온다. 그리고 암전이 되면 퇴장을 하고 다음 커튼콜까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감사인사를 드리러 올라가기 전까지 호흡을 진정시켜야 했다. 운동이라면 꾸준히 해온 편이고 체력 관리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호흡을 정리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공연이 끝나면 아쉬웠던 점이나 더 성장하고자 하는 부분들을 스스로 체크한다. 가장 먼저 생각났던 부분이 '이것'이었다.
만일 하나 그 거친 숨소리 뒤에 공연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온한 상태로 연기를 해야 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면?
욕심일 수도 있으나, 스스로에게 용납이 되지 않았다. 더 강해지고 더 훌륭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공연이 끝나면 나만의 시간을 갖으며, 평온하게 쉴까 했지만... 이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다시 산을 뛰고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 가혹하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어쩔 수 없는 성격 탓에 몸을 혹사시키는 경우가 여럿 있었다. 지금도 그러한 건 아닐까 싶지만 멈추는 게 쉽지가 않다.
올 한 해 공연을 매번 찾아와 주셨던 분에게 나는 어떤 배우일까.
지방 멀리서 올라와 16년 만에 무대에서 보는 동창에게 나는 어떤 배우일까.
추운 날 발걸음을 해준 나의 오랜 친구와 동료들에게 나는 어떤 배우일까.
행복하게 사는 게 최고라고 외치면서도 과연 나는 행복한 한 해를 보내고 있었을까?
결론짓기 어렵지만 그래도 감히 예상해 본다면 '행복했다'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관심과 사랑을 받았고, 쉼 없이 달려왔고, 스스로에게 나태해지거나 게을러지지 말라 한없이 외쳤기 때문에. (아마도?)
문득, 행복한 한 해의 마무리를 온전한 나를 위한 시간으로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찍도 당근도 없이.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기 위한 나만의 시간 말이다. 도시를 좋아하면서도 이럴 때면 꼭 자연을 찾더라.
자연한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나인걸- (미안. 자연아-)
그리고 멀리 떠나지 않고도 큰 나무를 바라보며 따뜻한 차 한잔과 달달한 간식이 있는 곳에서 쉬고 싶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넷플릭스가 나오는 TV도 있으면 더 좋고.)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책상에 앉아 눈을 감고 그려본다. 내가 원하는 장소와 원하는 분위기. 그리고 또 어떤 원하는 그 모든 것들을.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생각보다 마음이 평온해졌다.
다녀오진 않았지만 다녀온 것의 먼지만큼은 느껴진 것 같았다. 내가 그리 느꼈으면 그만 아닌가.
여행을 취미로 두거나 좋아했었던 적이 크게 없었지만, 용기를 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떠나는 여행. 노력하는 편의 인간형이지만 스스로의 휴식에 한없이 게으르고 무책임한 나이기에.
남은 12월의 며칠은 나를 위해 살아보련다.
공연은 끝이 났지만, 또다시 시작한다. 그렇게 12월은 끝과 시작을 말하며 살아간다.
큰 나무를 거실에 심고
천장을 뚫어 무럭무럭 자라게 하고 싶지만,
내 집도 아니고,
윗집에 예의도 아니고,
나무한테도 몹쓸 짓이라...
큰 나무를 그려 거실에 걸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