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마블런
강렬했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있음이 느껴지는 요즘. 완전한 가을이라 말하기엔 조금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가을이라 부르고 싶은 날들의 연속. 아무리 강한 해가 내리쬐어도 지긋지긋했던 여름 햇살에 비할바냐.
이렇게 말하고 나니 지나가버린 여름에 진절머리가 난 것 같지만 나름의 추억은 있었던 여름이었으니 적당히 미워하는 걸로- 언제나 늘 가을만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막상 여름이 없으면 또 서운 할 수도?
고통에서 얻어지는 교훈이 과연 좋은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름은 충분한 존재가치를 지닌 계절인 듯하다. 잘 가라 여름아-
살다 보니 내가 이것까지 하게 될 줄이야.
살다 보니 내가 이렇게 살고 있을 줄이야.
살다 보니 내가 이 정도 일 줄이야.
과거부터 나는 줄곳 러닝을 즐겨했다. 아! 사실 뛰는 모든 순간은 즐겼다고 말할 순 없지만, 대부분 자의적으로 뛰었고 그렇지 못한 뜀박질에도 긍정의 요소를 찾아 몸에 흡수시키곤 했다. 그렇게 뜀박질의 세월이 흘러 지금의 나는 마라톤이라 부를 수 있는 하프마라톤과 풀 마라톤을 나가는 상상을 하곤 했다.
8k 장애물 달리기 대회, 10k 달리기 대회 2번 , 12k 달리기 대회까지 총 4번의 행사들을 참여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힘듦에서 얻어지는 묘한 짜릿한 성취감. 이 맛에 뛴다는 말을 속으로 되풀이하며 뭉친 근육들을 풀어주었다. 그렇게 언젠가는 더 나아가 하프나 풀을 나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길까 라는 의문이 피어날 무렵.
무언가를 결정하고 행동할 때 필요한 건 '용기'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용기를 내고자 한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심오하게 파고들어 용기에 필요한 것들을 나열하기 시작해 봤다. 멋지고 아름다운 단어들의 향연. 하지만 그것들이 나의 행동과 결정에 방아쇠가 되진 않았다. '용기'가 총알이라면 앞으로 나아갈 방아쇠가 필요했다.
그렇다. 클릭 한 번이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이었다.
"에라이-모르겠다-"
이런 말 한마디에 많은 사람들이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다.
뛰다 보니...
하프마라톤을 나가게 되었다. 높아진 러닝의 인기 탓에 대회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클릭 한 번에 생애 첫 하프마라톤을 나가게 된 것이다.
뛸 수 있겠지?
당연하지. 나는 완주할 수 있는 확신이 있었다. 허나 그보다 더 높은 목표는 걷지 않기.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뛰어가는 게 첫 하프 마라톤의 목표였다.
많은 인파 속에 시작된 마라톤. 늘 그랬듯 처음에 느껴지는 빠른 심박을 진정시키고 리듬을 익힌 다음 몸에 밸런스가 맞춰지면 생각들에 빠진다. 그렇게 계속해서 뛰다 보니 지난 대회들의 목표점이었던 10k를 지났을 때쯤.
이제 11k 남았구나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다 멈췄다. 그리고 이제 소리 없는 전쟁. 긍정과 부정의 무기 없는 마찰에 심판은 긍정에 손을 쉽게 들어준다. 판정승이라기 보단 압도적 KO승.
15k 지났을 때 즈음이었나. 스멀스멀 올라오는 유혹들. 인정할 수 없는 위안들과 핑계들. 당차게 카운터펀치 날려주고,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물집이 잡혔음이 느껴졌지만 이쯤이야- 크게 문제 될 정돈 아니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지점은 20k. 마지막 1k가 남았던 곳. 세상에 그렇게 길게 느껴진 1k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20k 때 느꼈던 것보다 많은 것을 느끼게 된 마지막 1k 구간.
집에 돌아와서 양말을 벗어보니 보이는 발톱의 피멍들과 물집들. 통증보다 앞서간 성취감. 이 맛에 꾹-참고 끝까지 멈추지 않고 뛰었다. 누군가에겐 풀도 아닌 하프로 별 걸 다 느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난 느꼈으니까. 그랬으니까 기억하고 싶어 적어 내려 간다. 쓰면서도 느끼는 거지만 이건 정말 글로 남길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표현력이 부족해서일까. 내 마음에 새겨진 이 느낀 점을 고스란히 글로 남겨 두고두고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생각이 들 정도이지만, 그건 불가능하기에 남겨진 감정을 깨워줄 수 있을 만큼의 글 정도로만-
자신감이 생긴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러닝을 추천한다. 단순 뜀박질을 넘어 마라톤을 꼭 나가보시길.
끝으로,
19k 지점이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풀 마라톤... 나갈 수 있을까?'
오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풀 마라톤... 나가보고 싶을 것 같네?'
망설이는 일들은 누구에게나 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포기의 문제 이기 때문일까.
포기하는 것도 이젠 능력으로 보이는 삶.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았으면.
우린 매 순간 많은 걸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으니-
당신은 충분히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