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행복에 부채감을 유발하는 어른들
아이는 요즘 일주일에 두 번, 온라인으로 콜라주 수업을 듣는다. 선생님은 콜라주 기법을 사용하는 동화책 작가이신데 흑인 억양이 사뭇 강하시다. 사람들은 내가 통역사이므로 어떤 영어이든 척척 알아들으리라 짐작하지만, 절대 네버 그렇지 않다. 어릴 적 나의 리스닝 공부는 한국 서점가에서 판매되던 듣기 평가 테이프에만 의존하였으므로 미국 출신 백인 성우 발음에 편중되어 있었다. 다양한 억양을 듣기 시작한 건 인터넷이 발달하고 해외 뉴스와 드라마에 대한 접근성이 확대된 대학생 시절 이후였다.
통역사가 되고 나서 여러 클라이언트를 만난 경험도 리스닝에 도움이 되었다. 영어권 국가 외에도 인도, 중국, 베트남, 유럽 지역까지 영어를 사용했고, 발음과 억양이 가지각색이다. 귀를 쫑긋 세워야 하긴 하지만 감사하게도 통역사의 존재를 인식하고 배려하는 분들이 많았다. 발언이 한 번에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말씀을 끊어가시는 분들도 있었고.
반면 미국의 일상에서 듣는 영어는 다르다. 회의장에서는 비즈니스 계약이 걸려 있으므로 다들 신중하고 조리 있게 또박또박 발화하지만 일상에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뜬금없는 농담이 난무한다. 미국인들에게 위트란 중요한 덕목이라 고위급 인사의 발언에도 농담이 섞여 있어 통역 때에도 긴장하곤 했는데, 일상 생활에서는 시시한 아재 개그부터 상상 초월의 드립까지 언제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른다. 재미있자고 하는 농담인데 외국인으로선 제일 어렵다.
아이의 콜라주 선생님도 농담을 하신다. 선생님은 억양이 강하신 데다 말씀도 빠르셔서 나는 절망적이게도 가끔 선생님의 농담을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아이는 곧바로 알아듣고 깔깔 웃는다.
초등학교 시절 ‘사랑의 빵' 모금이 전국적으로 한창이었다. 너무 굶주린 나머지 오히려 배가 부풀어 오른 소말리아 어린이들과, 그들을 보듬는 배우 김혜자의 모습이 자주 전파를 탔다. 그리고 부모님이고 선생님이고 할 것 없이 소말리아 아이들과 대한민국 아이들의 현실을 비교하며 우리에게 “행복한 줄 알라"고 하셨다.
행복한 줄 알라고 하시는데 행복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행복감이 아니라 죄책감을 부추기고 있었다. 매 끼 배부르게 먹는 식사를 부담스럽게 만들었고, 그러자 식사를 부담스러워하는 마음이 죄스러워졌다. ‘행복'을 주장하기 위해 소말리아의 ‘불행’을 이용한 건 어른들인데, 죄책감은 오롯이 아이들의 몫이었다.
유사한 경우로 자신의 가난한 유년을 설명하며 아이들에게 “니들은 행복한 줄 알라"고 설교하는 어른들이 있다. 그런 스토리에도 아이들은 행복을 느끼지 않는다. 누군가의 불행에서 행복을 느낄 만큼 아이들은 몰양심적이지 않다. 어쩌지 못하는 남의 불행에 미안하면 미안했지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미국의 심리 상담가 로리 고틀립(Lori Gottlieb)은 <마음을 치료하는 법(Maybe You Should Talk to Someone)>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한 어머니의 사례를 든다. 그녀는 자식에게 새 신발이나 새 장난감을 사줄 때마다 “네가 얼마나 행운아인지 아느냐"고 질책을 한다. 그녀가 그렇게 자식에게 제공하는 물질에 대해 로리 고틀립은 “비난으로 싸여진 선물(A gift wrapped in a criticism)"이라 표현한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를 아이가 척척 알아들을 때, 듣기평가 테이프로 영어 공부하던 옛날 이야기를 읊고 싶지도 않고, 아이에게 “행복한 줄 알라"며 다그치고 싶지도 않다. 저기 한국 애들은 영어 교육에 수천만 원을 쓰고도 어른이 되어서까지 영어가 영어답지 못하다며, 한국의 뼈아픈 교육 문제를 우리 아이 행복에 이용하고 싶지도 않다.
어쩌다 미국에 살고 있을 뿐인데, 단지 그것 때문에 아이가 행복을 강요 받아서는 안 되고,
내가 원해서 미국에 와 놓고 마치 아이만을 위한 희생이었듯 “행복한 줄 알라"며 오만을 부려서도 안 된다.
어쩌다 풍요로운 세상에 태어난 요즘 아이들도 단지 그것 때문에 행복을 강요 받아서는 안 되고,
어른들은 스스로 원했던 풍요를 마치 후세만을 위한 희생이었듯 “행복한 줄 알라"며 오만을 부려서도 안 된다.
오만을 부리기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서 빼앗아간 것도 너무 많다.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시간
마음껏 숨쉴 수 있는 깨끗한 공기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
점점 요원해지는 취업과 내 집 장만의 기회까지, "행복한 줄 알라"며 으스대던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은 사실 행복하지만은 않다. 그들 시절엔 없던 행복을 아이들이 누리고는 있지만 그들 시절에 없던 수많은 불행 역시 아이들이 겪고 있다. 겪어보지 못한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어른들은 길잡이 역할에 실패할 수도 있다. 실패해도 괜찮다. 어른도 인간이니까. 다만 “행복한 줄 알라"며 아이들에게 부채감을 유발했다면, 당신이 아이들의 행복에 관대하지 않았듯이 본인의 실패에도 관대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