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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Nov 25. 2020

받는 사람 입장에서 줍시다 (2)

부모의 트라우마가 일으키는 체증

딸아이는 하루에 한 번 식사 시간에 물 대신 비타민 워터를 마신다. 우리 부부가 허락한다면 하루 세 끼 모두 비타민 워터를 마실 수도 있지만 (무설탕인데도) 단 맛이 나서 하루에 한 번으로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한 번에 세 컵씩 마실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아이는 비타민 워터를 매번 아껴 마신다. 호로록. 호로록. 이렇게 조금씩 먹어야 오래 먹을 수 있다면서.


비타민 워터를 아껴 마시는 아이를 보고 있자면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아껴 먹던 내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시다가 “팍팍 먹어, 팍팍" 하셨다. 아껴 먹고 싶다고 대답하면 “그까짓 거 뭐하러 아껴 먹느냐"고 하셨다. 그러면서 덧붙이셨다. “아빠가 또 사주면 되지, 팍팍 먹어, 팍팍.”


또 사주실 필요는 없는데… 나는 식탐이 많은 아이가 아니었다. 어쩌다 무언가 입에 맞으면 오래 먹고 싶은 마음에 아껴 먹었을 뿐. 입에 맞더라도 팍팍 많이 먹어야 한다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아버지가 “팍팍 먹어라"하시면 어린 나이에 뭐라 설명도 못하고 눈치를 보아가며 아껴 먹었고, 그래도 자꾸 간섭하시면 억지로 팍팍 먹었다. 짧은 순간이나마 내겐 소중했던 간식인데 아버지께서 자꾸 “그까짓 거"라고 하시는 걸 불쾌해하며.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에서 열린 불우이웃 돕기 바자회에서 나는 니트 스커트와 가디건을 구입했다. 저렴한 가격에 예쁜 옷도 얻고 불우이웃도 도왔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는데 아버지는 옷을 보시고는 “그까짓 거" 무엇하러 샀느냐고 하셨다.

“그까짓 게 그렇게 입고 싶었냐? 남이 입던 걸? 새 옷 사달라고 하면 충분히 사줄 텐데?”

불우이웃을 돕고 싶어서 샀다고 설명하려다 관두었다. 그 말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듯했고, 충분히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초등학교 6학년인 나는 몰랐다. 


이제 와서 설명해보자면, 그 옷은 그 옷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불우이웃 돕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남이 입던 옷이더라도, 아무리 저렴하더라도, 실사용자에게 실용성과 심미성을 제공한다면 물건이란 무엇이든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어떻게 즐길 것인지는 실사용자가 결정할 문제다. 타인이 섣불리 “그까짓 거"라고 하기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다.


아버지는 중고 구입에 특히 예민하셔서 내가 육아용품을 중고로 사들일 때에도 “그까짓 거" 그냥 새 거 사면 되지, 소중한 자식에게 남이 쓰던 물건을 준다고 문자 메시지까지 보내어 훈계를 하셨다. 나는 짜증스럽긴 해도 짜증을 내진 못했다. 아버지께서 자꾸 “그까짓 거"하시며 새 것을 강조하시는 이유는 당신이 유년기에 가난하셨고 그토록 새 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다.


가난의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아서 아버지는 어릴 적에 자주 먹던 감자를 싫어하셨고, 식혜는 남이 먹던 밥에 물 말아 놓은 것 같다고 마다하셨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국이나 찌개에 국물용으로 들어간 대멸치는 꼭 건져 드셨다. 이것도 ‘고기'라고 하시면서. 


찌개 국물에 퉁퉁 불은 멸치를 건져 드시는 아버지께 어머니는 “그까짓 거" 뭐하러 먹느냐고 하셨지만 나는 감히 “그까짓 거"라고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그 멸치를 ‘고기'라고 하신다면 아버지에게 그 멸치는 ‘고기'인 거다. 정말 ‘고기' 같을까 하고 나도 아버지를 따라 멸치를 건져 먹어 보기도 했다. 


트라우마는 사람을 일관성 없게 만든다. 뽀얗게 삶아진 감자도 싫으시고 달콤한 식혜도 싫으신데 국물 빠진 대멸치는 좋으시다니. 어린 딸이 과자를 아껴 먹으면 좀스럽게 보시면서 국물 빠진 대멸치는 자랑스레 드시다니. 수천 원에서 수십만 원 할인된 중고 물품은 하찮게 보시면서 국물 빠진 대멸치는 버리지 못하시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참으로 일관성이 없고, 일관성이 없으면 주변 사람이 피곤하다.


아버지는 내게 물건을 잘 사주셨다. 음악 CD, 잡지, 옷, 가방, 액세서리. 문제는 태반이 내가 원하지 않는 물건이었다는 거다. 선물이 방치되어 있으면 아버지는 내게 “아까운 줄을 모른다"고 하셨다. 하지만 물건의 가치를 떨어뜨리신 건 내가 아니라 아버지시다. 실사용자에 대한 고려 없이 구입된 순간, 물건은 가치가 급감한다. 가령,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사주신 가요 잡지의 가치는 내게 0원이었다. 당시 나는 국내 연예인에게는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오로지 영화 타이타닉에 빠져 있었는데 그 잡지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사진은 손톱만하게도 실려 있지 않았다. 싫은 티를 내었더니 아버지께서는 “고마운 줄 모른다"고 훈계를 하셨다. 그래서 그 잡지는 환불도, 교환도 하지 못한 채로 내 책상 한 구석에서 며칠 내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0원 신세가 되어버린 잡지에 가치를 부여해주고자 나는 잡지를 찢어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H.O.T. 기사는 H.O.T. 팬들에게, 젝스키스 기사는 젝키 팬들에게, 신화 기사는 신화 팬들에게. 그러고는 부모님께 또 혼이 났다. “너는 네가 준 선물을 갈기갈기 찢어 여기저기 나눠주면 좋겠니?”하고 다그치셨다. 논리도 없고 일관성도 없어서 헷갈렸다. 애초에 물건을 함부로 구입하여 가치를 떨어뜨리신 건 아버지인데, 애초에 실사용자의 취향도 모르고 무심했던 건 아버지인데, 가치를 살려보려 했던 내가 무심하다고 야단을 맞다니.


그래도 아버지의 선물들에 나는 ‘사랑'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며 미국까지 낑낑 싸들고 왔다. 작은 액세서리는 물론이고 가방과 옷까지. 제대로 착용하지 않아 “사 줘도 쓸 줄을 모른다" “게을러서 꾸미질 않는다"고 비난 받게 하던 물건들. 미국 내에서 이사를 다니며 그 물건들은 시나브로 구세군에 기부되었다. 기부를 하면서 의외로 아쉽지 않았다. 텅텅 비어가는 옷장에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아버지의 선물은 딸에 대한 사랑이긴 했지만, 그에 앞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까짓 거 나는 새 걸로 사줄 수 있어.
비싼 것도 이제 사줄 수 있지.
엄청 좋아하겠지? 고마워하겠지? 역시 난 좋은 아빠야.

당신이 고른 물건은 대단한 선물이고, 타인이 원하는 물건은 "그까짓 것"이라는 내로남불. 그런 아버지가 기분 내고 인정 받기 위해 구입하신 선물들, 매번 사용 여부를 확인 받고 비난 받느라 도대체 선물인지 수갑인지 모르겠던 그 물건들에 나는 체증이 있었나 보다. 기부를 하고 나서 속이 그리 시원했던 걸 보면.


딸아이는 오늘 저녁 강아지처럼 날름날름 비타민 워터를 핥아마셨다. 나도 어릴 적 그렇게 음료수를 할짝할짝 마신 적이 있다. 팍팍 좀 마시라는 아버지의 잔소리를 들으며.


내게 아직도 남아 있는 트라우마가 있을까? 해소되지 못한 부모의 트라우마는 자식에게 체증을 일으킨다. 내 딸은 자라서 내게 어떤 체증을 느낄까.


by Jin




받는 사람 입장에서 줍시다 (1): https://brunch.co.kr/@jin84/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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