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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Sep 02. 2020

받는 사람 입장에서 줍시다

자신의 결핍으로 사랑을 정의하는 어른들

(이 글은 물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질적으로 모자람이 없었던 사람의 투정이지요. 불편하실 분들은 패스해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풍요로운 유년기를 보낸 요즘 세대를 이해하는 데에는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ㅣ할머니에겐 그것이 사랑이었으니


얼마 전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께서는 자식과 손주들에게 끊임없이 먹을 것을 주셨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은 대한민국 거의 모든 할머니의 공통점이었다. 할머니들이 자꾸 먹을 것을 주시는 이유는 당신들이 먹을 것 없는 시대를 사셨기 때문이다. 먹을 것이 결핍되어 굶주렸던 유년의 기억은 마음 깊이 아로새겨진 채로 '먹을 것 = 최고 중요'라는 공식을 창출해 낸다. 그리고 그 공식은 의식적인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좀처럼 바뀌지 않은 채로 평생을 간다. 시간이 흐르고 강산이 변하여 풍요의 시대를 사는 손주들이 접시 가득 쌓인 송편에 손사래를 치는데도 할머니께서 과일에 식혜까지 자꾸만 내 오시는 이유도 바로 '먹을 것 = 최고 중요'라는 공식이 여태껏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들께 결핍되었던 바를 아낌 없이 나누며 할머니들은 사랑을 베풀고 있다고 믿으신다. 그런데 손주들의 입장은 어떨까? 대개 손주들은 그렇게 많이 먹고 싶어하지도 않고, 애초부터 먹을 것에 그다지 관심도 없고, 할머니께서 권하시듯이 남은 음식을 포장해 갈 생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착한 손주들은 할머니의 바람대로 꾸역꾸역 배 터지게 먹고는 바리바리 음식을 싸 간다. 나도 그 중 한 명이었으나 이따금은 '이렇게 무작정 비위를 맞추어 드리는 것이 정녕 할머니가 원하시는 바일까'하는 의문이 뇌리를 스치어 솔직하게 음식을 거절해 보기도 했다. 그 순간 서운한 기색이 역력하게 피어오르던 할머니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ㅣ내가 '사랑'이라 착각할 만한 것은


90년대 후반 중학교 시절, 친구들 사이에선 손편지가 한창 유행이었다. 방에서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노라면 어머니께서 불쑥 들어와 "맨날 보는 애들한테 뭐 하러 그런 걸 쓰냐"고 하셨다(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 신세대 독자가 계신다면, 친구를 만나 종일 놀고 헤어진 뒤에 카톡이나 페이스북 메신저로 다시 수다를 떠는 느낌이라고 보시면 된다). 어머니의 타박은 종종 "부모한테도 그렇게 해 보라"는 설교로 이어졌다. "나중에 남는 건 가족뿐이다," "친구 좋아해 봐야 소용 없다"는 말씀까지.


각각 중학교, 고등학교 예체능 교사였던 부모님께서는 평일이면 오후 여섯 시, 때로는 다섯 시도 되기 전에 꼬박꼬박 칼퇴근을 하셨고 여름과 겨울에는 기나긴 방학까지 있으셨다. 별다른 취미도 없으셨기에 부모님은 그 많은 시간의 대부분을 텔레비전 시청에 사용하셨는데 그나마도 지루해지면 괜히 내 방을 들락거리셨다. 방문을 열기 전에 노크도 일절 없었고 나 역시 그런 것을 요구할 줄 몰랐다. 한 번은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창문(창문 밖은 다용도실이었다) 쪽으로 불현듯 고개를 돌렸더니 어머니께서 고개를 쭉 빼고 내 방을 들여다 보고 계셨다.


집 안에 있는 동안엔 한가한 부모님의 레이더 망 안에 있었으므로 무언가 눈치 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중 가장 눈치 보이는 일은 친구에게 편지를 쓰거나 선물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한 번은 친구들에게 줄 빼빼로를 다섯 가닥씩 소포장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이를 보시곤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다그치셨다. 그러곤 같은 레퍼토리를 풀어 놓으셨다. 부모한테도 그렇게 좀 해 보라고.


쓸데없는 짓이라면서 본인 몫은 받고 싶어하는 이중적인 심리란.


할머니의 유년기에 식량이 결핍되었다면, 나의 유년기엔 '자유'가 결핍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내 방을 들여다보곤 "여보, 얘 좀 봐"하고 일거수 일투족을 어머니께 전달하기 일쑤였고, 어머니는 내 일기장까지 훔쳐 보셔서 중학교 때부터는 일기조차 쓸 수 없었다. 그 시절 내가 가장 갈구한 것은 나를 동물원 우리 안의 짐승 보듯 관찰하는 사람 없이, 입버릇처럼 "우린 너밖에 없다, 너 하나만 보고 산다"면서 정말로 나만 보고 있는 부모님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었다.



ㅣ나한테만 사랑이지 너한테는


결핍되었던 자유를 나는 자꾸만 내 아이에게 주었다.

"아무거나 해도 돼."

"엄만 다 괜찮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


한 번은 아이와 함께 같은 반 친구의 생일 선물을 사려고 장난감 가게에 간 적이 있다. 나는 가격대만 정해 주고 아이에게 직접 선물을 고르게 하였는데 아이는 삼십 분이 넘어 가도록 결정을 하지 못했다.

저 장난감 비행기는 예쁜데 인형이 안 들어 있고
저 바비 인형은 예쁜데 그 애가 좋아할지 모르겠고
저 바비 인형도 예쁜데 저걸 사 주면 나도 갖고 싶어질 것 같고
저 퍼즐은 괜찮아 보이지만 얼마나 재미있을지 모르겠고
저 책은 나는 좋지만 장난감이 아니라 지루할지 모르겠고.

고민을 하면 할수록 아이는 선택에서 점점 멀어졌다. 결국 내가 선택안을 두 가지로 좁혀 주었다. 바비 인형과 퍼즐. 그러자 아이가 퍼즐을 선택하는 데에 단 5초도 걸리지 않았다. 만일 그 날 아이에게 무한한 자유를 계속 주었더라면,

친구 선물도 네 맘대로,
점심 메뉴도 네 맘대로,
오후 활동도 네 맘대로,

하며 혼자 신나했더라면 아이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졌을 테다. 삼십 분이 아니라 한 시간이 넘도록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테지. 내 입장에선 사랑이라 믿고 건넨 선택의 자유가 아이에겐 숙제이고 부담이고 스트레스였다.



ㅣ사랑인지 덫인지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사랑은 물질적인 지원이었다. 고등학교 때엔 나의 무관심과 무기력으로 아무런 사교육도 받지 않았지만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때까지는 피아노도 배웠고, 한자와 산수 학습지도 했고, 영어 학원도 다녔고, 종합 학원도 다녔고, 수학 과외도 받아 보았다.


당시 학원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대학 입학 후엔 등록금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아버지는 혀를 내두르셨다. '혀를 내두른다'는 표현은 몹시 놀라거나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한다는 의미의 관용어구이지만 아버지는 정말로 혀를 빼고 내두르는 제스처를 취하셨다. 그럴 때마다 내가 미안해하면 아버지는 돈 생각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보란 듯이 혀를 빼며 생색을 내놓으시곤 돈 생각을 말라니. "집에 돈이 없어서 라면만 먹어야 한다" 또는 "너 키우느라 쎄가 빠진다"는 말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뱉아 주시면서 돈 생각을 말라니.


낯선 도시와 낯선 사람 사이에서 대학 첫 학기가 번개처럼 지나가고, 나는 여름 방학을 지내기 위해 부모님께서 계신 C시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래아 한글 프로그램을 열어 과외 전단지를 작성하곤 프린터로 수십 장을 출력하기 시작했다. 프린터가 작동하는 소리에 아니나 다를까 부모님께서 동시에 방으로 들어오셨다. 출력물을 보시고는 과외를 왜 하려 하느냐고 물으셨고, 나는 돈을 벌 거라고 대답했다. 등록금이나 용돈에 보태겠다고.


그러자 아버지는 코웃음을 치셨다. 돈은 필요한 대로 다 줄 터이니 공부나 하라고 하셨다. 당신들은 대학 시절 가장 큰 불만이 돈 걱정이었다고 하시며, 자식은 돈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돈 걱정을 매우 했다. 말로는 돈 걱정을 말라고 하시면서도 매번 혀를 내두르며 생색을 내시니 도대체가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돈 걱정은 대학원에 입학하고 가방끈만 길어지면서 더욱 커다래졌다. 학부 때는 한 번밖에 타지 못한 성적 장학금을 대학원에서는 다행히 전 학기 수령하였지만 그만한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아주 진상짓을 하였다. 수업이나 시험에서 통역 실수를 저지르면 그 실수를 곱씹으며 한참이나 징징거린 것이다. 혼자서 징징거린 게 아니라 주변의 동기들을 아무나 붙들고 대대적으로 징징거렸다. 실수 하나로 점수가 깎이고 장학금이 날아가는 상상은 누군가를 곧바로 붙들고 위로 받아야 할 만큼 내게는 커다란 공포였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통역 때마다 2년 내내 징징거리는 나를 상대하는 일은 동기들에게 몹시 피곤했을 테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면서 나는 2년 가까이 모은 월급을 전부 부모님께 드렸으나 부모님은 오히려 거기에 돈을 보태어 돌려 주셨다. 게다가 "딸이 빌라에서 사는 꼴은 못 본다"며 아파트를 구할 수 있도록 전세 자금까지 보태어 주셨으니 아주 두둑한 지원을 받았다. 가끔은 그 때 받은 전세금을 도로 돌려 드리는 상상을 한다. 그것은 부모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일일까? 손주가 음식을 거절하자 할머니께서 서운해하셨듯 부모님도 서운해하실까? 할머니에게 음식이 사랑이었듯 부모님에겐 돈이 사랑이었다.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음식을 주시며 그 음식이 얼마나 대단한지 혀를 내두르지 않으셨고
내가 음식을 거절할 때 코웃음을 치지도 않으셨으며
거절한 음식을 억지로 먹게 하지도 않으셨다.


아이가 장난감 가게에서 선물을 고르느라 애를 먹고 있을 때,

선택의 자유가 얼마나 큰 행운인지 내가 혀를 내둘렀더라면
아이가 선택을 주저할 때 내가 코웃음을 쳤더라면
아이가 선택을 포기하고 나서도 계속 선택을 강요했더라면

내가 준 자유는 더 이상 자유가 아니게 된다.

 

나 때는 그런 자유가 없었다며 과거의 결핍을 과시하고
왜 자유를 주어도 쓸 줄을 모르냐며 아이를 비하하고
고마운 줄 알라며 억지 자유를 무한 제공한다면

나는 나의 결핍에 갇힌 개구리에 불과하며, 그런 개구리가 주는 사랑은 덫이자 독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라는 결핍에 갇힌 부모의 사랑도 마찬가지. 당신들이 제공하는 물질적 지원에 매번 스스로 혀를 내두르시던 부모님께서는 내가 과거 학대의 기억을 꺼내 놓았을 때에도 "우리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만큼 돈 들여 공부시켰겠느냐"며 역시 물질을 앞세워 부채감을 유발시켰다. 그들에겐 '돈'이 대단한 사랑일지 몰라도, 본디 물질이 주는 행복감이란 임계치가 지극히 낮아서 조금만 충족되어도 더 이상 행복을 늘리지 못한다. 따라서 유년기가 풍요로웠던(많이 풍요로울 필요도 없다. 나 역시 몽당연필을 볼펜자루에 끼워 쓰고 버스비를 아끼고자 한 시간 거리를 걸어다니기도 했으나 물질에 대한 결핍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미 80년대 후반부터 아이들은 "장난감만 사주면 그만인가요, 예쁜 옷만 입혀주면 그만인가요" 하는 동요 가사를 널리 부르며 비물질적인 사랑을 바랐다.) 요즘 사람의 관점에서 '돈으로 주는 사랑'은 너무 쉬운 사랑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자본 축적이 쉬웠던 과거 세대가, 내 집 장만이 요원한 자식 부부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조건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례를 접하다 보면 '돈으로 주는 사랑'이란 역시 덫이자 독이다, 싶다.


결핍을 통해 자식을 보고 결핍을 통해 사랑한다면, 자식을 통하여 자신의 결핍을 해소하려는, 자식 사랑이 아닌 자신 사랑이다. 이것은 물질적인 지원과 더불어 부모님께서 내게 주신 소중한 깨달음이다. 그리고 아이는 내게 더더욱 소중한 과제를 주었다.


나의 결핍은 나의 결핍대로 두고 아이를 사랑하는 일,

나의 사랑 역시 과유불급이며 임계치가 존재함을 인정하는 일,

그러므로 나의 사랑 역시 덫이나 독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일,

아이에게도 어딘가에 결핍이 있거나 생길 것임을 인정하는 일,

아이의 결핍을 박멸할 만큼 내가 전지전능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일.


내 결핍과 경험의 우물에서 빠져나와 온전히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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