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속에 아른거리는 정인이
어머니는 옷을 잘 입으셨다. 상의와 하의를 세련되고 조화롭게 맞출 줄 아셨고, 출근 전엔 한 시간 가까이 화장과 머리 손질에 공을 들이셨다. 어쩌다 어머니가 학교를 방문하면 친구들은 어머니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너네 엄마라고? 진짜 예쁘시다."
"몇 살이셔? 뭐? 마흔 하나? 서른 하나가 아니고?"
"그... 그... <고독>에 나오는 그... 탤런트 이미숙? 닮으셨어!"
아버지는 바깥에서 내 자랑을 많이 하셨다. 예쁘고, 귀엽고,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잘 하고... 회식이 끝나면 거나하게 취해서 내 간식을 사오시곤 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사람들은 딸 사랑이 대단하다고 했지만, 그들은 모른다. 그가 사온 간식을 내가 먹지 않을 때 그가 퍼붓는 온갖 욕설을. 욕설을 퍼부으며 아들 없는 신세 한탄을 하고 가끔은 물건을 집어 던져 부순다는 사실을.
그러고 나면 부부싸움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부부싸움을 하고 나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를 험담하며 "결국 너 때문"이라고 아이를 탓한다는 사실을. 아이는 부부 사이의 완충재가 되어 충격을 대신 흡수해주다가 때로는 어머니에게 걷어차이고, 때론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한 번은 어머니에게 물고문을 당하고 칼로 위협을 받기도 했다는 사실을.
외부인은 전혀 모른다. 어머니는 우아해 보이고, 아버지는 다정해 보이니까, 의심조차 못한다. 게다가 아이가 부모를 잘 따른다. 어머니가 안아주면 저도 푹 안기고, 아버지가 뽀뽀를 원하면 달려가 뽀뽀한다. '아빠가 나한테 욕해요,' '엄마가 나를 때려요,'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아빠에게 욕을 먹고 엄마에게 맞은 이유는 철저히 아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믿으니까. "너 때문"이라고 부모에게 확인 받았고, '나 때문'이라고 믿어야 아이도 마음 편하다. 엄마 때문이라면 엄마가 변해야 하고, 아빠 때문이라면 아빠가 변해야 하는데, 엄마나 아빠를 바꿀 수는 없으니, 차라리 나 때문이라면 나만 잘하면 되니까, 나 때문이라고 믿는 편이 편하다. 그리고 나 때문에 초래된 욕설과 체벌에 대해 굳이 외부인에게 발설하여 외부인에게까지 꾸중 듣고 미움 받고 싶진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른다. 가정의 닫힌 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양모의 학대로 췌장이 절단되어 하늘나라에 간 정인이는 입양 전까지 위탁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정인이가 입양되고 난 후 위탁모는 양모의 동의를 얻어 정인이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관련 기사). 당시 피부가 까맣긴 했지만 양모는 밖을 많이 다녀서라고 해명했고, 아이가 양모와 잘 놀기에 학대라는 의심은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집에서는 안 놀아주는데, 밖에선 놀아줘서 신났을 수도 있겠구나"하고 위탁모는 돌이켰다.
아이들은 그만큼 단순하다. 집에서는 폭군이고 밖에선 천사인 부모는 위선자다. 하지만 아이들은 남에게 화살을 돌릴 줄 모른다. 집에서는 때리고 밖에서는 놀아주는 양모에게 정인이는 뜨악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신나서 같이 놀았을 뿐. 아이들은 그만큼 단순하다.
엄마가 이제는 화가 풀렸나봐.
엄마가 이제는 내가 좋은가봐.
엄마는 밖에 나오면 화가 풀리나봐.
엄마는 밖에 나오면 내가 좋은가봐.
밖에서까지 화를 낼 만큼 내가 싫진 않은가 봐.
그래서 기분이 좋아 잘 놀았을 거다. 놀다가 헤어질 즈음, 위탁모는 정인이를 안아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정인이가 유독 꼭 안겼다고. "그게 살려달라고 그런 거 아니었나…그걸 몰랐던 건 아닌가…" 하고 위탁모는 자책했다. 유달리 꼭 안겼다는 정인이는,
누군가가 안아준 것이 오랜만이라 계속 안겨 있고 싶었을 수도 있고,
집에 돌아가면 다시 화를 낼 엄마가 무서워서 계속 안겨 있고 싶었을 수도 있고,
아기 적 위탁모의 품이 그리워서 계속 안겨 있고 싶었을 수도 있고...
정인이의 위탁모는 이번 일이 '정인아, 미안해'로 그치지 말고,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함께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인이의 양모는 병원에서 무릎을 꿇고 "우리 아이 죽으면 어떡하냐"고 통곡했다고 한다.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는 "뼈가 부러질 만큼 때린 적은 없다"고 했고, 양모의 변호인은 "소파에서 뛰어내리며 아이를 발로 밟았다는 의혹은 사실무근"이라며 양모가 "이 같은 의혹이 있다는 얘기를 듣자 놀라며 오열했다"고 했다.
내 어머니도 거의 오열하셨다. 어릴 적 왜 나를 칼로 위협했냐는 질문에 어머니는 심장이 벌렁거린다면서 그런 적이 없다고 훌쩍이셨다. 만일 내가 아직 어린 아이였더라면 어머니의 말을 믿었을 거다. 네 기억은 틀렸다는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믿고 자책했을 거다. 이상한 기억이나 만들어내고, 난 정말 이상한 애다, 어머니가 저렇게 우시는데, 하면서. 하지만 나는 거의 마흔이고, 초등학생인 딸을 키워보았고, 어린 아이는 잔인한 일을 직접 겪지 않는 이상 현실감 있게 상상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리고 그동안의 행동 패턴을 통해 어머니는 위선자라는 퍼즐을 맞추었기에, 어머니의 주장보다 내 기억을 믿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훌쩍임이 정말 의아하고 궁금해서 여쭈었다.
"지금 연기해?"
그러자 어머니는 엄하게 돌변하여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다그치셨다. 아동 학대는 내로남불의 정점. 자신이 아동을 상대로 가한 모욕에 대해서는 "아이가 말을 안 들어서," "훈육이었을 뿐," "나쁜 의도는 없었다"고 화살을 아이에게 돌리고 포장을 잘도 하면서, 남들이 자신에게 하는 지적에 대해서는 엄청난 모욕을 당한 양, 성역을 침범 당한 양 통곡하고, 오열하고, 억울해하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문제는 그런 코스프레가 통한다는 거다. 특히 부모가 희생과 헌신의 아이콘으로 신성시되고 자녀 체벌에 관대한 사회에서는 더더욱. 학대가 의심되어도 문제 제기를 하기까지 조심스럽고, 온몸의 피부가 멍자국으로 새카매도 증거 불충분이고(심지어 그것이 몽고반점이라는 부모의 말을 믿어주고), 때때로 가해 부모는 자신이 피해자인 양 신고자를 위협하기도 한다.
설상가상으로 아이들은 부모가 처벌 받길 원치 않는다. 중학교 보건 교사인 친구의 말에 따르면 학대 정황이 포착되어도 아이들이 "제발 신고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고.
부모님이 감옥에 가면 나는 어디로 가지?
나 때문에 부모님이 감옥에 가면 나는 미안해서 어떻게 살지?
부모님이 잘해주실 때도 많은데... 나쁜 분들 아니야...
영혼이 약해진 아이들에게 '효'를 가르치는 사회, 아직도 '사랑의 매'라고 말하는 사회, 부모의 권위와 친권 앞에서 경찰도 작아지는 사회, 사건이 터질 때만 펄펄 끓고 아동 격리 시설은 부족한 사회, 모두가 공범이다. 췌장이 절단되는 극단적인 사건에는 다같이 응당 분노하면서, 닫힌 문 안에서 시나브로 자행되는 폭언과 폭력에는 둔감하다.
"적당한 체벌은 필요하지."
"그 정도 욕은 괜찮지 않나?"
"부모도 인간이니까, 부모도 부모가 처음이니까."
그런 식이라면 아이들은 인생 자체가 처음이다. 부모의 잘못은 부모가 처음이라 용서해야 하지만 아이의 잘못은 인생이 처음임에도 구타하고 욕해야 하나? 역시 내로남불의 정점. 겨우 그 정도 체벌, 겨우 그 정도 욕설, 겨우 그 정도 비난도 매일매일 당하면, 똑똑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에 돌덩이가 파이듯이, 아이들의 영혼에 구멍이 파인다.
욕하고 때리지 않으면 아이가 말을 안 듣는다고? 그건 당신의 인내심 부족, 지식 부족, 능력 부족이다. 아이들이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듯이 당신도 화살을 자신에게 돌려봐라. 피해자 코스프레 좀 그만 하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