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어른들
열한 살이던 94년 초봄의 토요일 밤에 어머니께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받아야 한다며 잠시 바깥을 다녀오자고 하셨다. 나는 잠옷을 벗고 원피스 아래에 속바지를 입었다. 어머니는 그 옷차림을 보더니 손가락질을 하시며 스타킹을 신으라고 하셨다. 94년은 역사적으로 더웠던 해다. 그날도 하교길에 땀을 흘려 찬물로 샤워를 했던 바, 나는 스타킹을 신기를 거부하였다. 어머니는 그래도 밤이므로 추울 것이라 다그치셨고, 나는 '잠시'만이라면서 무슨 상관이냐고 반박하였다. 그럼에도 계속되는 강요에 나는 이렇게 외치기에 이른다.
"내가 추운데 엄마가 무슨 상관이야!"
그날 밤 나는 버릇이 없다며 여러 차례 뺨을 맞고 쓰러진 뒤 수차례 발길질을 당했다. 그날 어머니에게 무언가를 누기 위해 근처로 왔다는 누군가는 얼마 동안이나 기다려야 했을까.
열다섯 살이던 98년, 과학의 날 기념 경진대회에서 사용할 고무동력기를 만들고 있었다. 좁은 방에서 부모님은 내 양 옆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날개에 종이를 어떻게 붙일지, 고무줄을 어떻게 끼울지 시시콜콜 참견을 이어가셨다. 부모님은 나와 의견이 상이할 뿐 아니라 당신들끼리도 의견이 엇갈려 고무동력기를 서로 가로채가며 들여다보셨다. 참다 못한 나는 다시 금기어를 내뱉는다.
"어떻게 만들든 엄마 아빠가 무슨 상관이야!"
그날 나는 역시 버릇이 없다며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고 다음 날 교복 치마 아래로 수십 개의 선명한 빨간 줄을 내보이며 등교를 하였다.
누군가로 인해 짜증이 날 때에 영어로는 '내 피부 밑으로 들어간다(gets under my skin)'는 표현을 쓸 수 있다. 타인의 피부 밑으로 들어가려면 선을 넘어야 한다. 우선은 그 사람의 퍼스널스페이스(personal space)를 침범한 뒤 그 사람의 육체 속으로 파고 들어야 한다. 허락도 없이 그만큼이나 깊숙히 선을 넘어 오니 그 사람 입장에서는 화가 치민다.
부모는 아이에게 자꾸 선을 넘는다. 아직 자의식이 형성되지 않은 영아라면 경계가 침범되어도 저항하지 않는다. 부모가 주는 모유/분유나 이유식을 그대로 받아 먹고, 옷도 부모가 입히는 대로 입으며, 장난감도 부모가 주는 대로 가지고 논다. 영아기가 끝나는 시기는 이론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만 1세로 규정한다. 이후로 자의식이 발달하면 뭐든지 싫다고 도리질을 하는 시기가 온다. 콩나물도 도리도리, 가디건도 도리도리, 먹고 싶은 것만 먹고, 입고 싶은 것만 입으면서 시도 때도 없이 "내가! 내가 할래!"를 외치는 그 시기.
그 시기부터 부모는 물러나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어떤 부모는 "싫어!"를 외치는 아이를 두고 '말을 듣지 않는다' 내지는 '버릇이 없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뒤로 물러나기는 커녕 자꾸만 앞으로 들이대며 언성을 높인다. 강한 아이들은 그런 부모를 맞서 이기려 하고, 순한 아이들은 부모의 목소리를 그대로 받아 들인다. 전자의 경우 집 안에 큰 소리가 그칠 날이 없고, 후자의 경우 아이가 주관을 키우지 못한다. 전자도 문제지만 후자는 더 큰 문제다.
"쪼끄만 게 뭘 안다고."
"넌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해."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아이가 순할수록 부모들은 이런 말을 쉽게 하고, 그러고도 반항을 겪지 않는다. 겉으로는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는 듯 보인다. 아이는 말썽 없이, 탈 없이, 바르게 자라고 있고, 그렇게 착한 아이를 키운 자기 자신이 어쩌면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순하고 조용한 아이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감감 모르는 채로.
"강준상이 없잖아, 강준상이! 내가 누군질 모르겠다고. 여태 '병원장' 그 목표 하나만 보고 살아 왔는데, 그거 좇다가! 내 딸 내 손으로 죽인 놈이 돼버렸잖아! 병원장이 뭐라고, 그까짓 게 뭐라고, 내가 누군지를 모르겠어. 허깨비가 된 거 같다고, 내가!"
드라마 <SKY 캐슬>에서 어머니의 바람대로 의사가 되고 병원장이 된 인물, 강준상의 절규.
부모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아이는 자기 생각을 키우지 못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연습도 하지 못한다. 무언가 억울하여 언젠가 반항을 하더라도 자신의 생각과 목소리가 희미하여 행동 방향을 줏대 있게 설정하지 못한다. 더 이상 부모 말은 듣기 싫은데 주관마저 없으므로 최악의 경우 친구를 따라간다. 그렇게 아이는 친구 따라 저 멀리 강남엘 간다(쓰고 보니 이상하다. 요즘은 강남이 성공의 이미지이므로 속담을 바꿔야 하나?).
한편 끝까지 지고지순한 아이는? 강준상이 된다. 어머니가 퍼스널스페이스를 침공하여 피부 속으로 들어와 내면을 완전히 헤집어 놓았으니 강준상 본인의 말대로 껍데기만 남은 '허깨비'가 된다.
대한민국 제 18대 대선을 앞두고 언젠가 아버지께 왜 1번 후보를 지지하느냐고 여쭌 적이 있다. 아버지는 1번 후보가 이런 저런 잡다한 소리를 않고 '확실'한 데가 있다고 하셨다. 나는 공약에 기반한 의견을 듣고 싶었던 건데 그러질 못해서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입을 다물었더랬다.
대선이 끝나고 서너 달이 지난 후 부모님과 제주도로 태교 여행을 떠났다. 남편은 회사일과 유학 준비로 분주하여 뒤늦게야 합류할 예정이어서 초반의 며칠을 부모님하고만 보내었다. 한 번은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같이 아침 식사를 하다가 대선 이야기가 나와서 나는 2번 후보에 투표하였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아버지가 깜짝 놀라시며 물으셨다.
"왜?"
그렇게 깜짝 놀라시는 모습에 나도 깜짝 놀랐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요즘 여자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는 독신인 박근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망상을 늘어 놓으셨을 때에도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요즘 여자들에게 그 분은 영향 받고 싶은 인물이 아니다"라고 쏘아붙였는데, 그런 내가 그녀에게 투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왜 이리 놀랄 일이지?
말문이 막힌 내가 아무 대답이 없자 아버지는 재차 물으셨다.
"너 저번에 왜 1번 후보를 지지하느냐고 아빠한테 물었었잖아. 그런데 왜?"
아버지의 사고 회로는 아래와 같았다.
딸이 의견을 물어 봄
-> 내가 의견을 말함
-> 딸이 내 의견을 들음
-> 이제 딸은 내 의견대로 함
'아빠에게 의견을 물었다고 해서 내가 왜 아빠 의견을 따르리라 믿느냐'고 나는 묻지 않았다. 물론 어릴 적처럼 "아빠가 무슨 상관이냐"고 따지지도 않았고.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태교 여행 중이었다. 오랜 시간 굳어져 웬만하면 변하지 않을 아버지의 사고 회로에 지적질을 하느라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고, 자식을 독립시키고 예순이 가까워져도 당신의 의견이 곧 자식의 의견이 되리라 믿는 아버지의 나르시시즘이 측은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저 "1번 후보의 환경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만 하였다.
수년이 흐른 이제는 아버지의 정치적 견해를 들을 기회조차 없다. 우리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이제 부모님은 내 내면을 휘저어 놓기 위해 선을 넘을래도 물리적인 이유로 넘지 못하신다. 그 사실이 안타깝기도 전에 안도부터 되는 것은 몹시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