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골디락스 Oct 14. 2022

엄마는 내가 공무원이 아니라고 무시한다


기억나지 않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아빠는 직장에 다녔다. 지금은 사기업이 된 KT에 다녔는데, 예전에는 공기업이었다. 그때는 한국통신이라고 불렀다. 핸드폰이 없던 때 공중전화를 관리했다. 안정적인 직장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 나의 기억 속에 아빠는 오토바이를 탔다. 한국통신이라고 써진 민트색 박스가 달린 오토바이였다. 공중전화를 돌아다니면서 동전을 수거하러 다녔다. 아빠가 공중전화에서 돈을 수거하면 그 동전이 다 아빠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길거리에 공중전화기를 볼 때면 우리 아빠 돈이 가득 들어있는 저금통처럼 보였다.


시간이 지나서 아빠는 조그만 경차를 타고 다녔다. 민트색으로 한국통신이라고 써진 회사 차였다. 이 차를 타고 고장 난 공중전화를 고치러 다녔다. 술 취한 사람이 공중전화 유리 문을 부수어 놓으면 출동해서 유리를 치우기도 했다. 하루는 아빠가 퇴근했는데 손에 붕대가 칭칭 감아져 있었다. 유리가 깨져서 고치다가 다쳤다고 했다. '아빠가 다쳤으니까 아빠가 출근을 안 할 테고 나는 아빠랑 놀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아빠는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출근했다.


시간이 지나서 회사 차가 아니고 우리 아빠 차가 생겼다. 현대 로고가 박힌 회색 악센트였다. 주말이면 아빠는 집 마당에서 차를 닦고 또 닦았다. 바퀴에 먼지도 털어내고 유리도 깨끗하게 닦았다. 아빠는 그때부터 양복을 입고 회사로 출근했다. 더 이상 파란색 회사 면 점퍼를 입지 않았다. 단정한 양복을 입고, 깨끗한 셔츠를 입고 출근했다.


아빠가 회색 악센트를 타고 출근하던 그때쯤 우리 집은 넉넉했다. 엄마 아빠가 사이가 제일 좋았던 즈음이기도 하다. 나는 어린 나이에 돈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아버렸다. 아빠가 양복을 입고 나서부터는 집에서 좀처럼 싸우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하루는 엄마가 자기 친구들을 우르르 아빠 회사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친구들이랑 ‘우연히’ 회사 옆을 지나가다가 아빠 개인 사무실에 들려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왔다고 했다. 설날과 추석이면 우리 집에 과일상자가 쌓였다. 우리 집에 놀러 오는 회사 아저씨들은 커다란 과자 선물 상자를 사 왔고, 어린 우리 삼 남매의 손에 용돈을 챙겨주었다.


아빠는 고작 1년, 개인 사무실을 가졌다. 어느 순간 출근을 할 때도 퇴근을 할 때도 한숨을 쉬었다. 담배도 더 많이 피웠다. 엄마 아빠는 ‘명예퇴직’ ‘퇴직금’과 같은 당시의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단어들을 써가며 대화했다. IMF였다.


“아빠가 회사에서 잘렸구나..."

초등학교 고학년, 아니 중학생쯤이었던 것 같다. 나는 조용히 눈치를 챘다.


부모님은 우리 집의 재정상태를 말로 표현한 적이 없었다. 하루 세끼 밥을 굶지 않고 먹었고, 밭에 둘러싸인 아주 외진 곳이기는 했지만 우리 집이 있었다. 작은 마당이 있었고 이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회사 이름이 써지지 않은 우리 아빠 차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이 꽤나 잘 사는 편인 줄 알았다. 친구들 모두 고만고만 농사를 짓는 촌 동네에서 살아서 비교 대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빠가 매일 아침 입고 출근하던 양복에는 먼지가 쌓여갔다. 주말이면 거실에 앉아서 물을 칙칙 뿌리고 다리미로 아빠 셔츠를 다리던 엄마의 모습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아빠는 자고 일어나면 사각팬티에 하얀 러닝셔츠를 입고 담배를 뻑뻑 피우면서 집안을 어슬렁거렸다. 더 이상 아빠에게서 남자스킨 냄새가 나지 않았다. 느지막하게 일어나서 담배를 피우다가 후줄근한 옷으로 갈아입고 밭으로 갔다. 아빠는 전업 농사꾼이 되었고, 더 빨리 늙어갔다.


엄마는 식당 일을 시작했다. 주중에는 식당 일을 하고 주말에는 아빠와 함께 밭일을 했다. 엄마와 아빠는 자주 싸웠다. 여름에도 더운 식당에서 일하는 엄마가 안쓰러우면서도, 일을 나가는 편이 엄마에게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아빠가 담배를 뻑뻑 피우는 모습을 보면서 싸우느니 그냥 일하러 나가는 편이 나은 편일지도 모른다.


우리 집안 사정은 조금씩 좋아졌다. 엄마 아빠가 우리 셋을 공부시키고 먹이기 위해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빠는 예전보다 더 술을 많이 마시고 더 담배를 피웠다. 엄마 아빠는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웠지만 하여튼 우리 삼 남매는 모두 4년제 대학을 나왔고, 매끼 밥을 차려줬다.


엄마가 난데없이 전화 와서는 ‘공무원이 최고’라고 이야기한다.


9급 행정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사촌동생을 보면서 우리 집안에 이런 경사가 있다면서 좋아하다가도 결국 에효- 하고 한숨을 쉰다. 자식을 셋이나 낳았는데 공무원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내 친구를 보면서 ‘그 집 엄마는 자식농사 성공해신게.'라고 말한다. 소방 공무원이 된 남동생 친구에게는 '그렇게 안 봤는데 머리도 좋고 야무지다'라는 찬사를 보낸다.


엄마 눈에 둘째 딸은 언제나 '뭘 하는지 모르겠는 아이' 쓸데없이 바쁜 아이' 다. 엄마 기준에 나는 성공한 인생이 아니다. 글을 쓴다느니, 영상을 만든다니, 강의를 한다느니 엄마 생각에 둘째 딸은 불합격, 땡이다. 공무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기업도 안전하지 않은 직장이고 공무원이 되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엄마, 안정적인 직장이 어디 있어. 아빠도 짤렸잖아."


”공기업이니까 잘리지. 공무원은 안 잘린다."


전화를 끊고 조용한 거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빨간 자두를 베어먹고 있으니 눈앞에 젊은 엄마가 보인다. 사모님 소리를 고작 1년 들었다. 시집와서 아이 셋 낳아 키우고, 매일 아침 남편의 밥상을 차려주었다. 고작 1년. 남편 덕 조금 보나 싶었더니 다시 식당에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엄마의 공무원 타령을 이해해 보려고 애써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