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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잔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by 햇님이반짝


새벽에 알람 없이 눈을 뜬 적은 있어도 여섯 시에 스스로 몸을 일으킨 건 오랜만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람은 무시하고 이불을 목 끝까지 짝 끌어올렸었다. 늘은 나를 한 번 이겨보고 싶었다.



사과와 오렌지를 씻어 접시에 담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홍삼을 며칠 전부터 챙겨 먹기 시작했다. 남편도 주고 나도 마셨다. 아이들은 순수히 마시지 않는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운동을 하겠다는 첫째의 말을 믿고 싶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 뻔했다. 운동장 하루 뛰고 와서는 그 뒤로 알이 배겼다며 가지 않았다. 학원 일정이 없는 날과 내가 퇴근하고 집에 오면 아이는 늘 침대와 한 몸이 되어있었다. '피곤한가 보네'라고 생각하다가도 '운동을 안 하니 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라며 단정 지었다. 사춘기가 잠으로 온다? 인터넷에 '잠춘기'라는 단어를 처음 보았다. 우리 아이만 그런 건 아니라며 위안을 삼는다.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고 삼이라도 마셔야 면역력이 올라가고 체력을 키운다며 반강제로 먹였다. 둘째보다 첫째의 거부가 심하다. 사약받듯이 겨우 넘긴다.






출근 전까지 누워있었다. 일 가니까 괜찮아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매번 일찍 일어나야지 했던 마음은 새벽 여섯 시만 되면 마땅히 보상이라도 받듯 합리화시켰다. 출근은 늦잠의 유이자 변명이 되었다. 아침만 되면 몸무게보다 마음이 몇 배로 무겁다. 그런 마음이 몸을 일으켜 움직였다. 세상에 이런 일이다.


"나갔다 올게. 홍삼 마시고 달걀밥 먹어라"
"다른 거 먹어도 돼?"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직접 들으니 또 서운하다. 대꾸도 안 하고 그냥 나왔다. '먹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속으로 삼켰다. 시원하게 마시라고 일부러 얼음도 넣어놨는데.


기상 인증 / 출근 전 걷고 뛰기


집으로 돌아오니 컵 안이 비어있었다. 웬일이야. 내가 없으면 당연히 안 마실줄 알았다. 달걀밥은 한 숟갈 남겨놓고 다 먹었다. 과일은 안 먹었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반이상은 했다. 딸아이가 안 마시면 내가 마시려고 했다. 비워있는 컵을 보니 이게 뭐라고 절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라도 챙겨주고 싶었다. 빈 잔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아이가 마신 건 홍삼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었다.


친정엄마가 몸에 좋은 음식 먹으라고 주었을 때 나는 잘 먹었던가. 끝까지 먹는 걸 봐야 마음이 놓였던 것처럼 나도 딸에게 바라고 있었다. 이번에는 먹어줬지만 왠지 다음은 없을 것 같다. 엄마처럼 포기하지 않고 물어봐야 하는지. 건강 챙기기 어렵다.


아침 여섯 시 기상은 나를 일으키는 힘을 기르는 시간이자 아이와의 밀당 시간이다. 빈 잔 만들기. 괜히 비장해진다. 새벽 기상도 아이와의 실랑이도 매일이 도전이고 시행착오를 거친다. 성공과 실패가 빈번하다.



내가 새벽 기상을 포기하지 않듯 딸아이의 체력도 놓치지 말아야겠다. "안 마신다고"라는 말을 들으면 또 속상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엄마라는 명찰을 단 무게인 것을. 명찰 내가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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