냥이과 콩이, 권력관계가 바뀌다
나는 지금 육체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낯선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낯선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이듦이 그저 주어지는 것일 수는 없다. 노년이어도 꿈꾸기를 포기할 수도 없다. 그 꿈이 ‘새끈한’연애거나 ‘효리네’ 엇비슷한 목가적 삶이거나 그런 걸 리야 만무하다. 청년의 열정에 버금가는, 자연스러운 자유를 꿈꾸는 한편,
멋진 노인이고자 하는 꿈.......
우리 집에는 고양이 두 마리가 있다.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큰놈이 먼저 우리집에 왔다. 처음에는 고양이를 집에 데려오겠다는 딸 아이의 청을 단호하게 묵살했다. 강아지고 고양이고 집안에 다니는 게 싫었다. 자고로 동물은 마당에서 뛰어다녀야 하며, 반려동물을 키우는 데 들어가는 돈은 밥 굶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내게 반려동물을 집에 들이는 일은 자연스럽지 않은 일로 여겨졌고, 자연스럽지 않은 일은 영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딸 아이의 요청은 집요했다. 친구의 부모님 공장 마당에서 지내던 길냥이 새끼인데 너무 가여워서 친구 집에 데려왔다고 했다. 딸아이는 친구 집에서 놀다 아기고양이들과 정이 들었고, 그 집에서 다 감당하기가 어려워 갈 곳을 찾는 터라 집에 데려오겠다고 보챘던 모양이다.
아이의 청이 워낙 집요해 어물쩍하다가 데려온 게 거의 10년쯤 된 거 같다. 살다 살다 고양이를 집에 들이게 될 줄이야. 전혀 예상 못한 일이다. 강아지도 아니고 고양이를. 고양이란 얼마나 기묘한 느낌을 주는 동물이던가. 내가 어릴 때 보던 만화책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하나같이 요물이거나 약거나 사악했다! 생각을 잘 정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인간과 종이 다른 생명을 맞이해야 했다.
처음엔 무엇을 먹여야 하는지, 어디다 똥오줌을 배설하게 해야 하는지 등으로 마음이 바빴다. 친근함도 애정도 별로 느낄 수 없었다. 접종을 하러 간 동물병원에서, 냥냥이의 엄마(이녀석의 이름이 냥냥이다) 이름을 쓰라고 할 때, 불편했다. 나는 고양이를 낳은 적이 없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어느 날인가, 침대에서 혼곤히 낮잠을 잤다. 집은 비어 있었고, 볕은 좋은 봄날이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종아리 한쪽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가만히 내려다보니 냥냥이가 내 종아리에 기댄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 냥냥이라는 존재가 내게도 하나의 ‘꽃’이 되었던 것 같다. 놀랄 만큼 보드라운 털, 몸을 돌돌 말면 털뭉치처럼 보일 정도의 유연함, 친밀감에도 적절한 거리를 넘지 않는 독립심…. 고양이라는 낯선 종에 대해 애정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고양이 엄마가 될 정도는 아니고.
도대체 세월은 왜 이리 제멋대로 속도를 낸담. 5년, 10년이 하룻밤의 꿈이다. 딸아이가, 날카롭던 사춘기 시절 냥냥이가 그 어떤 존재보다도 위로가 됐었다고 내게 말했다. 그렇게 훌쩍 세월이 흘렀고, 5년 전쯤, 또 한 마리의 고양이를 식구로 맞았다. 이번에도 반대를 했지만 찬성쪽 식구들의 쪽수가 더 많았고, 마음 한편에 큰놈에게 같은 종의 식구와 살아보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냥저냥 이래저래 하다가 고양이 두 마리와 살게 되었다.
작은놈 이름은 콩콩이다.(냥냥이는 냥이라고 부르고, 콩콩이는 콩이라고 부른다.) 종이 같다고 친구 먹는다면, 우리 인간들도 전 세계 사람들과 하나가 되겠지만, 그럴 리가다. 나이 차도, 집에 들어온 연수도 다른 냥이와 콩이는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처음부터 으르렁거리며 학학거렸다. 냥이는 코쇼라는 종이고(희고 검은 얼룩이 있는 한국의 길냥이종), 콩이는 스코티시종인데 그래서 좀 덩치가 작다.
어리고 작은 콩이는 이미 딸아이의 사랑을 독점한 냥이의 기세를 넘어설 수 없었다. 눈치를 보았고, 냥이가 우리들 사이에 있으면 기웃거리며 다가오지 못했다. 그 하는 양을 보는 게 편할 리가. 한술 더 떠 밥을 먹을 때도 눈치를 봤다. 둘의 밥그릇에 밥을 담으면, 냥이가 먼저 잡숫는 것을 본 다음에야 콩이가 먹었다. 먹는 속도도 콩이는 느렸고(나이가 어려 작은데다 워낙 체구가 작은 종이라 치아발달도 덜한 편 같다.) 그런 콩이를 큰놈이 기세등등 바라보면 슬그머니 먹다가 말았다. 그 남은 밥을 큰놈이 주워먹어 큰놈은 살이 찌고, 작은 놈은 여의었다. 작은놈이 가여워 몰래몰래 습식 간식을 콩이에게 주고는 했다.
그런데 말이다, 어느 순간, 전세가 역전이다.
큰놈 나이 열 살이면 묘생으로 치면, 노년에 접어들고, 작은놈 나이 대여섯 살이면 청년기인 셈이다. 어느 날 보니 콩이 몸집이 딴딴해졌다. 좀 살이 찐 느낌이 들었다. 어라, 무슨 일이지 하고 넘어갔는데, 밥그릇에 달려드는 품이 달라졌다. 콩이가 먼저 뛰어들어와 차지했고, 냥이 눈치도 보지 않았으며, 먹는 속도도 빨라졌다. 콩이가 드세지고 의기양양해진 건 좋은데, 냥이가 눈에 띄게 굼떠지고 얌전해졌다. 그 까칠한 성깔이 죽었다! 콩이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 냥이에게 뭘 해줄 수 있을까. 몰래 간식을 먹이는 거? 밥을 빼앗아기는 것 같지는 않고 이미 살이 제법 쪄 있으니 먹을 걸 더 챙겨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딸아이 품을 파고들어 독차지 하는 것도 여전하고. 그저 냥이는 늙어갈 뿐이다. 굼뜨고, 종일 누워 있고, 놀잇감 앞에서도 뛸 수 없다. 며칠 전에는 방광에 돌이 생겨 수술도 했다. 한 눈은 백내장도 왔단다.
고양이 두 녀석의 세대교체를 바라보는 데 문득 서글픈 마음이 든다. 부모와 내가 자리바꿈하듯(부모의 보호자 노릇을 우리가 하게 됐으니) 나와 아이들이 자리바꿈할 날도 아주 오래 남은 것 같지 않다. 이 너무도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데 세대교체의 징후를 보다 종종 마음이 저리곤 한다. 콩이야 몰래몰래 간식을 먹이는 것으로 짠한 마음을 달랠 수 있었지만, 늙어가는 냥이에게는 딱히 해줄 게 없다. 콩이는 약한 생명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조금 더 신경을 써서 돌보면 되었지만 냥이에게는 나도 모르게 저절로 감정이입이 되었다. 더 이상 젊지 않은 시간, 반백을 넘은 나이여서겠지. 나는 지금 육체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낯선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낯선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이듦이 그저 주어지는 것일 수는 없다. 노년이어도 꿈꾸기를 포기할 수도 없다. 그 꿈이 ‘새끈한’연애거나 ‘효리네’ 엇비슷한 목가적 삶이거나 그런 걸리야 만무하다. 청년의 열정에 버금가는, 자연스러운 자유를 꿈꾸는 한편, 멋진 노인이고자 하는 꿈. 노인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어떻게 세워나갈지 당분간 씨름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