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쉬걸을 보다가
겨울밤, 홀로 골목길을 걷다가 무심히 고개를 들면, 집집의 창문에서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불빛들을 만나곤 한다. 참 따뜻해 보이는 온기. 어떨 땐 그 정겨운 빛이 시린 마음을 다독여주지만, 어떨 땐 오히려 내 쓸쓸함을 운동장만하게 보이게 한다. 추울 땐 따뜻한 게 그리워진다지. 맥락이 없지만 왠지 사랑은 꼭 겨울 같다.
두 해 전 겨울, 물경 쉰 살이 넘은 나이였지만 나는 사랑에 대해 깊이 고뇌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뭔지 혼자서 묻고 또 물었다. 당시 나는 스무 살에 만나 연애를 하고 두 아이를 낳고 오랫동안 한 울타리에서 살아온 사람과 이별 중이었다. 원망과 회한, 슬픔은 당연히 산만큼 컸지만, 이별의 와중에도 우리는 서로를 걱정했고, 날선 싸움도 없었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완전한 것이나) 우리는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혹은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해가 사랑의 다른 말이라고들 하는데 우리는 어떤 부부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는데도 왜 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물론 결혼이라는 풀기 복잡한 함수의 위력 탓도 있다.) 평생을 한 사람을 사랑하며 살았는데 이런 허무한 결론에 도달하고 보니 사랑이란 게 뭔지, 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사랑에 눈뜬(?) 건 중학생 무렵이었던 것 같다. 다들 비슷하겠지. 성당 다니는 한해 선배를 짝사랑했다. 말도 변변히 못 나눴는데 꽤 오래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놀랐던 것도 같긴 하다만. 재미있는 건 십대에 발견한 그 마음이 이십대는 말할 것도 없고 삼십대, 사십대, 오십대, 육십대, 칠십대, 아니 그 이상까지도 가더란 얘기다. 나이와 무관하게 어른들은 늘 사랑을 꿈꾼다. 남녀노소 없이 온통 사랑타령이다. 사랑은 어른의 판타지인 것 같다.
우리가 사랑만큼 갈구하는 또 하나가 행복이다. 사랑과 행복은 둘 다 정의내릴 수 없고, 실재가 없으며, 그래서 손에 쥘 수 없는 추상적 개념이다. 그러나 둘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는 완연하게 다르다. 사람들은 행복은 실재하지 않고 따라서 손에 쥘 수 없다는 것에 수긍한다. 하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다르다. 사랑은 가질 수 있다고, 늘 곁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믿는다. 사랑하는 사람만 만나면. 사랑하는 그 혹은 그녀를 만나서 함께 살게 되면 외출하려고 나설 때 현관에서 찾아 신는 신발처럼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물건처럼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논리적으로 보면 행복이 실재하지 않듯, 사랑도 없는 것 아닌가. 물론 누군가는 행복이 왜 없냐고 버럭 화를 낼 수도 있고, 버젓이 있는 이 사랑을, 사랑이라고 이름 하지 않으면 무엇이냐고 따져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의 유통기한 운운하는 얘기는 생략하련다. 경험적으로 그런 것 같다. 적어도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그 눈부신 사랑은 분명히 유통기한이 있어보인다. 행복은 손에 닿지 않는 찰나적 감정이라고 하면서 사랑은 늘 소유하면서 공기처럼 호흡하고 싶고 그 실재를 늘 확인하고 싶어하는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느 순간, 사랑은 없다는 생각에 동의하게 됐다. 적어도 우리가 사랑이라고 주장하고, 고집부리며 강요하는 그런 사랑은 없는 게 맞단 생각이 들었다. 다시 행복과 비교해보자. 행복이란 감정은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 다양한 순간에 다양한 지점에서 다양한 의미로 행복을 맛본다. 또한 살아가면서 자기만의 언어로 자신의 행복을 설명한다. 행복이 현실적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평균적인 상(像)이 별로 공고하지 않다.
하지만 사랑은 어떤가. 우리가 사랑이라고 흔하게 부르는 그것은 추상적 개념인데도 불구하고 공고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것도 아주 시시콜콜하게. 사랑한다면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조항이 백만 가지는 되는 것 같다.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학 박사가 아닌 내가 어찌 알겠냐마는. 그런 사랑은 사랑 같지 않거나 사랑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세속적으로 우리가 아주 흔하게 말하는 그런 사랑은 없다고 나는 생각하기로 했다.
두해 전 겨울 오후, 두터운 커튼으로 겨울 태양을 막고 거실 쇼파에 비스듬히 누워 <대니쉬걸>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젊고 아름다운 화가 부부가 사랑을 나눈다. 덴마크의 풍경화 화가 에르나르 베게너와 초상화 화가 아내 게르다. 영화에 대해 아무 정보도 없었던 탓에 그저 부러운 듯 보고 있는데 영화는 점점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남편 에르나르는 몇 개의 에피소드를 겪으며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게 되고, 결국 여성의 모습(릴리엘베라는 이름의)으로 살면서 게르다의 모델로도 활동한다. 그 17년의 세월을 아내 게르다는 함께 한다. 남편의 변화를 지켜보는 게르다의 슬픈 눈빛이 지금도 생각난다.
마침내 에르나르는 성 전환 수술을 감행한다. 성의 혼란을 정신병으로 치부해 뇌수술, 전기치료를 하던 시절이었고,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수술이었으며, 그만큼 위험했다. 그는 2년 동안 5번의 성전환 수술을 감행했고, 49살에 수술 후유증으로 숨을 거둔다. 이 영화는 실화에 기반했으며, 릴리엘베는 세계 최초로 성전환을 받은 여성으로 기록돼 있단다.
아름답고 고통스럽고 슬픈 영화였으며, 남배우의 연기는 잊혀지지 않을 만큼 섬세했고, 화폭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게르다의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남편의 정체성 혼란을 지켜보며 끝까지 그 고통을 이해하고 곁을 떠나지 않은 담대하고 진실한. 그가 그이든 그녀이든 있는 그대로, 고통 속에 있는 한 인간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는. 게르다의 사랑을 보면서 나 아닌 타자에 대한 이해와 책임이 진짜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사랑이 뭔지 한 인간이 어찌 속시원히 알겠는가. 사랑이 속빈 강정 같을 때도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우리가 왜 사랑을 꿈꾸는지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사는 게 힘이 드니 사랑만한 구원이 없다. 삶이 추워서 따뜻한 것을 그리워하듯 그래서 사랑은 꼭 겨울 같다. 그리고 사랑은 없다고 말하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사랑을 꿈꾸고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