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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Sep 14. 2019

바닐라라테

#33ㅣ바닐라라테는 평생 친구이자 사랑입니다^^

    

“Can I get grande, extra shot, hot vanilla latte, please!”
“Sure, Hi, Good morning Jina?

  

거의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 스타벅스에서 주고받는 똑같은 대화다. 매일 가다 보니 일하는 점원이 내 이름을 기억하고 반갑게 인사한다. 주문을 하면 이름을 물어보고, 컴퓨터에 이름을 입력하고, 빈 컵에 주문 스티커가 부착되고, 준비가 되면 손님 각자가 자기 이름을 확인하고 가져가니 처음에 이름을 꼭 물어본다.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다.


언제부터 커피를 마셨는지 뚜렷한 기억은 없다. 아주 어릴 때 엄마가 손님이 오시면 이쁘게 꽃 그려진, 손잡이가 둥그런 호사스러운 찻잔을 제일 높은 유리 찬장에서 조심스럽게 꺼내어 까만 가루를 한 스푼 넣고 설탕을 듬뿍 넣어 살짝 노란 거품 띠가 나게 저어 소반에 받치고 우아하게 소담을 나누시다, 손님이 가시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엄마가 치우시기 전에 찻잔에 조금 남겨진 엷고 검은 물을 마시면 달달 하면서 살짝 뒷맛은 쓴듯했지만, 몰래 입맛 다셔보는 거라 꿀물 같은 황홀한 어른의 맛을 맛볼 수 있었다. 어릴 때의 맛의 추억은 평생을 간다고 그때의 달달함이 커피의 진정한 맛 인양 그 뒤로 난 쓴 커피는 손사래 치며 싫어했다. 

    

내가 고등학교 때쯤 그때는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게 유행이었다. 과외가 금지된 세대여서인지 학교가 끝나기가 무섭게 독서실로 향했다. 우리 모두에게 그곳은 제2의 친구들과의 만남의 장소인 셈이었다. 시끄러운 집이 아닌 혼자만의 좁은 장소에서 집중하며 공부를 하기 위한 비싼 장소인데 나에게는 공부도 뒷전이고 친구도 뒷전이고 딱 하나의 목적만이 독서실의 유일한 존재 이유였다. 독서실에는 남자 룸, 여자 룸이 따로 구분되어 있고 휴게실이라지만 조그맣게 룸은 아니더라도 옹기종기 수다를 떨 수 있는 그야말로 논다는 애들의 집합소로 조금만 늦게 가면 안 되는 게 그 아이들이 점령함으로 나의 커피를 마실 수 없기 때문이다.  

       

커피 자판기라는 게 처음 도입되어 거리에도 한두 군데 설치되어 있었지만 어린 학생들이 대놓고 빼먹기에는 어른들의 눈치가 보여 나 같은 배짱으로는 곁눈질에 침만 흘려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실 휴게실의 커피 자판기는 대놓고 빼먹을 수 있는 허락된 곳이니 내가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하지만 노는 아이들의 따가운 시선도 어른들의 눈총만큼이나 겁이 났던 게 사실이라 누구보다도 먼저 도착해서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은밀하게 믹스커피를 한잔 빼서 여자 방으로 온 다음 천천히 음미하는 그 시간이야말로 나만의 사춘기 시절 의식절차였다.

  Cafe라는 영어이름이 다방의 고루함을 한방에 날린 신개념의 오픈 커피숍 


그때쯤, 흔하게 있는 다방만이 커피를 파는 곳이라 생각했는데 ‘Cafe’라는 영어 이름이 다방의 고루한 단어를 한 방에 날려 버렸다. 다방이 카페로 교체되면서 아저씨나 나이 많은 사람들만 다니던 곳이 젊은 층들도 즐겨 가는 곳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부뚜막이 주방이 되어 우리 엄마들의 폐쇄적 공간이 가족들의 오픈 공간이 되었듯 다방이 Cafe로 바귀면서 어른이라면 누구나 갈수 있는 오픈 장소가 된 셈이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막 도입된 시기라 나도 그 흐름에 친구를 따라 한두 번 어른들 몰래 대학생처럼 옷을 입고 카페를 가보았는데, 어둑한 뿌연 안갯속에 푹신한 소파가 군데군데 있는 동굴 같은 곳이어서 왠지 음침한, 감히 고등학생 신분으로는 출입 금지된 곳으로 느껴졌다. 좀 논다는 아이들은 그곳에서 죽순이가 된다는 소문이 흉흉했던 곳이 바로 카페이기도 했다.

  

대학생들의 전유물 인양 모든 대학거리는 카페로 넘쳐나고 각양각색의 인테리어를 앞다퉈 선보이는 시기였기에 나에게는 더없는 호사를 누리기에 알맞은 장소였다. 카페에서 알바를 해보는 게 꿈이어서 잠깐 해보기도 했고 학교 앞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진한 에스프레소로 멋을 내려다가 한 모금도 못 마시고 자리만 지켜야 했던 기억도 있다. 원두커피를 마셔야 진정한 커피광이라는 말에 인스턴트가 아닌 원두커피를 마셔보았지만 달달함이 빠진 커피는 내겐 커피가 아니라 그냥 쓴 물이나 한약이라는 사실만 깨닫게 해 주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맨 먼저 하는 일은 커피 한 스푼, 설탕 한 스푼, 프림 두 스푼을 넣고 정수기의 뜨거운 물 한잔을 누르는 일로 아침의 시작을 알린다. 눈을 반쯤만 뜨고도 아니 눈을 감고도 해오는 습관이 어느덧 30여 년이 흘렀다. 시아버님은 나의 황금비율의 커피에 반하셔서 다른 사람 커피는 다 제쳐두시고 ‘지나가 커피를 타야 맛있지’ 하시며 꼭 한잔을 부탁하셨고 이곳으로 오기 전에 황금비율을 전수해 드렸는데 당신이 타시니 그 맛이 안 난다  하시며, 내 마법의 스푼까지 빼앗아 가셨다. 지금도 시아버님의 추억은 커피의 기억으로부터의 아련함이 되었다. 

 

나의 커피 맛은 이렇다. 일단 하얀 부드러운 우유의 진하고 뭉틍한 거품이 살짝 달달 하고도 씁쓰름한 커피의 진함과 섞이면서 입안에서 기품 있게 넘어가는 목넘김이 좋다. 밀도가 높을수록 더욱 진한 뭉틍한 부드러운 맛이 나는데 너무 높으면 부드러움이 강해 목 넘김이 어렵고 너무 낮으면 거품이 커져 기품이 아니라 싸구려스런 얄팍함에 금세 실망한다. 그래서 그 뭉틍한 밀도의 강약이 나에겐 관건이다.


거품이 서서히 작아지며 커피와 우유에 녹아들어 가면서 커피 전체의 맛이 더욱 부드러워지는데 거품이 사라지기 전 부드러움을 만끽하고자 거품이 남아있는 그 선까진 누가 나를 방해할세라 눈을 꼭 감고 마실 정도로 음미하며 마신다. 그 거품이 있는 선까진 나만의 커피 시간으로 혼자 마시는 걸 좋아하고 같이 마시더라도 대화하는 게 즐겁지 않다. 그 선이 넘어가면 거품이 모두 녹아 없어져 거의 3/1 정도는 마치 내가 언제 그리도 안타까워하며 마셨나 할 정도로 방치하게 된다. 식든 말든, 버리든 말든... 그래서 내가 커피를 남기면 한 마디씩 한다. 

왜 이렇게 식혀서 커피를 마시니? 그럼 작은 사이즈를 마시지 그래?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있다. 그렇게도 좋아하는 나의 커피 맛이 달라질 때가 있다. 임신을 하면 입덧의 신호로 커피 맛이 180도 달라지는데 내 배 안에 아기의 씨앗이 생기면 씨앗이 거부를 하는 건지 정말로 나의 모성본능으로 거부를 하는지 알 수는 없다. 일단 커피의 향이 죽을 맛이다. 보통 밥하고 뜸 들일 때 나오는 김이 계란 삶은 냄새와 같기 때문에 역겨워지는데, 난 커피의 고소한 냄새가 역겨워진다.


더불어 콩 종류로 만들어지는 된장 콩이나 참기름, 들기름처럼 참깨도 포함 그런 냄새가 싫어진다. 참깨를 넣은 볶음밥도 못먹었으니 꽤나 유난스러운 까탈스러움이다. 내가 안타깝게도 계류유산을 여러 번 했는데 커피 냄새가 역겨워지면 입덧의 신호로 정상적인 임신이 되고 원래의 맛으로 이상이 없으면 유산이 되는 자동 반응이 되어 ‘커피 맛아! 떨어져라 하고 기도를 한 적도 많다.

    

커피의 선호도가 높은 미국에 와서는 각종 커피머신을 접할 수 있었다. 원두만을 짜서 내려 먹는 간단한 기계에서부터 기다란 유리컵에 뜨거운 물을 붓고 원두를 위에 넣은 상태에서 불린 다음 그대로 꾹 눌러 내려 먹는 일체형 원두 컵도 이용해 보고, 라테를 만들려고 우유 거품기만 따로도 사용해 보았는데 최근엔 라테를 바로 만드는 일체형 머신을 사보았다. 유리병에 우유를 넣으면 작은 거품기가 열을 내며 돌면서 진하게 거품을 만들고 그 위로 원두커피가 한 방울씩 떨어져 우유와 커피가 바로 섞이며 라테가 만들어지고 거기에 바닐라 시럽을 듬뿍 넣으면 바닐라 라테가 라벤더 시럽을 넣으면 라벤더 라테가 된다. 

   

그래도 내가 만드는 라테가 커피전문점의 바리스타가 만들어주는 라테를 어떻게 따라갈 수 있으랴! 가까이 스타벅스가 있어서 얼마나 행운인지.. 나처럼 진정한 커피 맛이 달달함만 있으면 오케이 하는 사람들은 스타벅스의 빠르고 간단하게 즐길 수 있다는 거에 대만족이지만 정말 커피에 대한 끝없는 해박한 지식과 시고 달고 쓴 커피 맛의 종류를 구별하는 커피광들에겐 이런 곳이 꽝일 것이다.

    

그랬던 이곳에 새바람이 불었다. 바로 한국에서 유명한 카페 베네라는 커피전문점이 이 시골에 상륙했다. 그 이름도 찬란하게 간판에 카페라는 이름이 들어가서 커피전문점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풍기고 베네라는 말이 카페와 딱 붙어 자연스럽게 발음되는 ‘카페베네’가 그것도 내가 알고 있었던 같은 또래 친구가 오픈을 했으니, 난 참새가 방앗간 다니듯 들락날락거렸다.


미국 사람들에게도 스타벅스만이 커피를 파는 곳인 줄 알았다가 인테리어도 특이하고 모던하면서도 편안한 안정감이 있고 여러 사람이 모여 수다를 떨기도 좋고 창가에 기다란 테이블에 혼자 사색하기에도 좋아서 인기 있는 명소가 되었으니 한국 사람인 나도 기분이 우쭐해진다. 카페베네가 성공하니 신라 베이커리니, 뚜레쥬르니, 라브랑제리 등 속속 오픈하고 이제는 ‘Korea way’라는 길 이름이 걸릴 정도로 유명한 한국타운의 거리가 되었다.

    내가 이렇게 커피를 좋아하는건 아빠의 영향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이렇게 커피를 좋아하고 카페를 좋아하는 이유가 우리 아빠의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빠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매일 다방을 가시는 분으로 유명하셨다. 쉬는 날이어도 늦은 아침을 드시고 꼭 가시는 곳이 집 앞 다방이었고 지금 팔십이 넘으신 나이신데도 매일 다방으로 출근을 하신다. 이쁜 다방 아가씨가 그 많은 세월 바뀌지 않을 리 없고, 그 많은 세월 바뀌지 않은 다방이 없을 텐데 하루도 빼지 않고 다방을 가신다는 건 이쁜 아가씨도 아니고 추억의 장소도 아닌 아빠만의 하루 습관인 거 같다.


다방이라는 곳에서의 안정감을 이제는 노인정에서 느껴야 될 거 같지만 노인 됨을 거부하시는 일괄된 행동으로 다방만을 가신다. 엄마가 지금처럼 아프지 않으실 때 몇 번 다투신 기억도 난다. 왜 꼭 다방에 가서 커피에 돈을 쓰냐, 이쁜 다방 레지라도 만나냐, 내가 이쁜 컵에 타 주겠다며.. 이제는 나도 나이가 들어 스타벅스니 카페베네니 매일 다방을 들락거려보니 그곳이 어떤 곳이든 누가 있든 그냥 커피를 마시는 잠시의 시간이 주는 행복이 돈과는 바꿀 수 없는 나만의 만족이고, 나만의 행복이라는 걸 이해할 거 같다.

     

평생 친구 내 커피는 잠깐 운전을 할 때도 제일 먼저 챙겨 내가 손만 뻗으면 있어야 할 일순위이고, 한국을 갈 때도 비행기 안에서 꺼내야 하는 일순위 아이템이고, 공항에 내려서도 잴 먼저 찾아야 하는 일순위 장소이다. 나에게  일순위가 바닐라 라테임을 아는 사람들은 나에게 커피를 사주는 모두가 사랑이고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봄눈 녹듯 풀어진다는 걸 안다. 그중에서도 제일 잘 아는 한 명이 있다.


오봉맨(다방 언니들이 오봉에 커피를 들고 다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함) 임을 자청하며 시간만 나면, 아마 자다 가도 사 올 사람이다, 한잔을 들고 내가 일하는 곳에 서 있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저렇게 착한 남편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하지만 부부 일은 부부만 안다고 그럴만하니까 하겠지? 딱 그 거품선 까진 모든 게 용서된다. 그다음엔 방치된다는 걸 그들은 모를 것이다. 

   나만의 공기와 같은 커피, 나만의 물로 위안 삼아 이 험한 세상을 그것과 더불어 살고 숨 쉬는 게 아닐까?

     

눈을 뜨고 잠자리에 드는 그 순간까지 내 옆을 이리 조용히 달콤하게 지켜주는 것이 커피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나는 누군가가, 어떤 무엇이 항상 내 옆에 있기를 바라는 외로운 팔랑귀라는데 내 옆에 그림자처럼 조용히 지켜주는 그 무언가가 다름 아닌 커피여서 난 좋다. 누구에겐 안경 없이 세상을 볼 수 없음으로 안경이 몸의 일부가 되어 공기처럼 딱 붙어있고, 누구에겐 어울리지도 않은 목걸이를 돌아가신 어머님의 유품이라며 누런 금덩이를 걸고 다녀 그 금덩이와 평생을 같이 할 것이고, 또 누구에겐 아침에 먹는 물 4잔이 만병통치약이라며 일어나자마자 들이키는 그 물이 건강한 몸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런 나만의 공기와 같은 커피, 나만의 물로 위안 삼아 이 험한 세상을 그것과 더불어 살고 숨 쉬는 게 아닐까?

    

이 불볕더위에도 뜨거운 바닐라 라테를 먹기 위해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운전을 해서 뚜레쥬르에서 한잔을 사 오며 거품이 사라질까 살짝살짝 입맛 다시며 집에 왔다. 해는 뜨겁게 따갑지만 라테는 뜨겁게 달콤하다. 그렇다고 차가운 걸 먹는 건 반칙이다. 내 친구를 덥다고 배신할 수는 없지. 내 평생 친구는 항상 따뜻하고 달콤하니까...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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