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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Dec 27. 2020

빼앗긴 지구에도 봄은 오는가?

코로나 19로 2020년을 빼앗긴 우리에게 2021년의 봄이 올까?


한국에서 끝장드라마가 오랜만에 안방을 후끈 강타했다.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나에게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이 드라마 이야기로 꽃을 피우며 꼭 보라는 말을 몇 차례나 했다.

바로 '팬트하우스'다. 뭐 이야기 줄거리를 말하지 않아도 모두들 알고 있을 거라 미루어 짐작하고...


하고 싶은 열망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고야 마는 인간의 본능을 그대로 표출한 이야기,

남을 밟고 일어서야 내가 살 수 있다는 비열한 욕망, 

오를 수 없는 나무라도 주변의 모든 가지를 억지로 쳐내면서 끝까지 오르고자 하는 잔인한 인간성,

이 모든 인간의 욕망을 넘어서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내용들을 담은 끝장 드라마고 막장 드라마인데, 


우리는 왜 이런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드라마에 열광하는가?


시대가 각박하고 암울할수록 인간의 도덕성을 상실한 자극적인 내용으로 인간의 잔인함의 끝을 보여주는 이야기나 영화가 많아진다고 한다. 해리포터 같은 판타지는 인간에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해 소설 속에서는 무한대의 영역에서 즐길 수 있는 이야기로 그나마 건전하게 우리가 함께 즐길 수 있지만, <돌이킬 수 없는 (Irreversible, 2002)> 이나 <마루타 (黑太陽 731: Men Behind The Sun, 1988)> 같은 영화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반항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내용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다한들 이번 코로나보다 더 강력한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가?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이번 2020년에 일어났다. 코로나 19는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이미 넘어섰다. 코로나 19는 전쟁으로 인해 앗아간 목숨의 몇 배의 목숨이 한순간에 힘없이 사라졌고, SF 영화에서 바이러스로 인해 죽음을 당한 상상 속의 인간들보다 더 잔인한 죽음을 당했고 불행하게도 지금도 진행중이다. 마지막 죽음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할 수 없는 상상 이상의 현실이 우리들 눈앞에 계속해서 펼쳐지고 있다.


어떠한 드라마가 이렇게 잔인하고, 전 세계인을 한마디도 하지 못하게 방안에만 가두고, 인간의 욕망을 한순간에 차단할 수 있었을까? 코로나 19는 돈이 있든, 지위가 높든, 아이든, 어른이든, 누구든, 어디서든, 세계인 모두를 공포로 몰아넣었고, 돈이 억만금 있다 해도 마음 놓고 여행하지 못하게 했고, 그 누구도 마스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한 대단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죽어버린, 그리고 사라져 버린 2020년


2019년 마지막을 장식하는 나의 2020년 계획안에는 가족여행도 있었고 여러 모임도 있었다. 또한 대망의 획을 긋는 새로운 한 해가 될 줄 알았다. 마치 2000년, 새천년의 해를 맞이했듯이... 반대로 컴퓨터가 19에서 20으로 바뀌며 넘버를 인식하지 못해서 세상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되었다. 21세기가 되면 마치 천지가 개벽해 땅과 하늘이 뒤바뀐 삶이 될 거라는, 영화에서 미래를 가는 우주를 가르는 열차를 타고 저 지구 끝, 하늘 끝을 내달릴 줄 알았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20년이 흐르고 2020년을 맞이하며 또 한 번 용솟음치는 한 해가 되리가 짐작했다. 일론 머스크의 화성 진입이 코앞으로 다가온 듯했고 전기차가 상용화되고 무인 자동차가 연속으로 출시되는 한편, AI 인공지능이 상상 초월로 발전되어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면 인간이 더 이상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제약이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2020년을 출발했음을 부인하지 못했었는데....


2020년 새해가 밝자마자 터진 코로나 19가 솔솔 인간의 입으로 전해지고 마스크를 쓰니 마니 하더니 급기야 바이러스로 사람의 목숨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점점 믿기지 않는 일들이 연속되었고 그 어떠한 상상 속의 이야기에서도, 그 어떠한 괴기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지구의 멈춤이 서서히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다가오는 게 아니라 한 번에 확 눈 깜짝할 사이에 지구 인구의 숫자를 줄여버렸다. 


설마설마하며 지내온 시간이 벌써 일 년이다.


내가 겪은 가장 큰일이라고는 새마을 운동으로 한국인 모두가 어려운 시기를 딛고 일어난 일과 IMF로 경기가 좋지 않아 한국인의 힘으로 금을 모아 극복한 일 정도였다. 전쟁을 겪지 않았고 자연재해로 집을 잃지 않았고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린 배의 배고픔을 알지 못했다. 모두 힘든 시기였다지만 감히 목숨의 위태함을 겪어보지 못했다. 그저 역사책에서 읽은 지나간 과거의 배고픔 정도였다. 


전쟁이나 기아로 인한 모든 일들은 그저 인간으로 인해 일어나고 인간이 극복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 이상한 바이러스는 내가, 나만 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바이러스가 전파되고, 그것이 목숨과 직결되는 일이었다. 전쟁에서도 살아남는 사람은 있었고 영웅이 있었는데 바이러스는 차원이 달랐다. 


빼앗긴 들에서도 봄은 왔었다. 그 봄의 향연을 만끽하기만 하면 되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사라진 영혼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그 자리에 마스크 쓰기와 사람 간 거리 두기는 영원한 현실이 되었다. 그렇게나 열광하는 포옹(hug)은 아마도 영원히 종식될 것이다.

어디에서 그들의 억울한 목숨 값을 대신해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어디에서 친밀한 포옹의 온기를 다시 느낄 수 있을 것인가?


2020을 우리 모두는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그 시간을 우리는 누군가에게 보상을 받으려 하고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 바이러스가 최초로 나온 장소의 원인을 따지고 왜 그곳이었나를 묻고 초기대응에 대한 잘못을 묻고 또 묻고 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으로 지구를 함부로 대한 책임이고 모든 인간의 잘못이다. 맞다. 어디에서 시작되었든, 초기대응의 잘잘못이 있었든, 대통령의 바보스런 대처든 모두 이미 지나간 일이다. 아무도 겪어보지 못했고 어디에도 쓰여있지 않은 판례인데 어느 누가 제대로 대처할 수 있었을까? 겪고 나니 알 수 있었다. 바이러스는 인간의 환경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지구의 생존을 영원한 신의 개념으로 영원불멸한 변치 않는 쇳덩이로 생각했다는데 큰 문제가 있었다.


지구는 우주에 있는 하나의 살아있는 덩어리로 함부로 대하면 금이 가고 깨지기 쉽고 급기야 소멸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는 많은 소중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지구를 소중한 나의 애장품으로 대해야 한다. 다음 세대에게 대물림할 수 있게 소중히 가꾸어야 지구인과 함께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음을 알았다. 나무 한뿌리 개미 한 마리의 목숨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랑의 가슴을 가져야 한다. 환경을 헤치는 행동을 삼가야 하고 편안함만을 추구했던 그동안의 행동을 과감히 바꿔야 하며 날로 발전만 했던 현대인들의 생활방식에 제동을 걸고 그에 맞는 캠페인에 적극 동참하지구의 깨끗한 1인이 되어야 한다


깨끗한 지구의 1인이 되자


그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너무도 소중한 목숨이 사라지고 지금도 너무 아파하지만, 그 목숨 값으로 지구가 우리에게 알려준 사실을 되새겨야 한다. 그 사실을 잊는다면 또다시 어떠한 형태로 목숨 값을 치르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이 지구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면 빼앗긴 지구에 다시 봄이 올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 살다 보니 한국 드라마를 볼 길이 많지 않다. 유튜브로 짜깁기해서 내용을 보니 완전한 이해가 되지는 않다. 아이들이 한마디 한다.


''끝장드라마 라며 계속 보네요??''


하... 이상한 건 이런 막장 드라마를 보고 나면 이런 드라마를 내가 왜 봤지? 정말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인가? 싶어 시간이 아깝다며 후회하다가도 마지막 장면에서 궁금증이 유발되어 다음 편을 나도 모르게 꾹 누른다는 거... 눈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마음도 좋지 않다. 그만 봐야 하는데...


PS: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를 함께 감상해요.

마지막에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에서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제발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해봅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 빼앗긴 들에도 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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