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저녁부터 또 눈이 내렸다. 소복이 눈이 쌓이더니 빗소리인가? 가만히 있는 창문의 두드림 소리에 슬며시 잠에서 깼다. 창문에 코를 대고 입김으로 맑은 유리를 뿌옇게 물들이며 창밖을 보니 정말 투명한 줄기들이 서로의 길을 내주며 줄줄이 땅으로 내려가고 있다.
바닥으로 시선을 고정시킨다. 대지의 흙 위에 눈이 쌓이고 쌓여 두텁고 뽀얀 따뜻한 이불이 되어있다. 그 위로 비가 내리면, 먹물이 번지듯 조금씩 스며들면서 눈의 부드러움이 배시시 웃으며 눈의 모습을 소리 없이 지워야 하고, 자고로 눈이 내린다면 애초부터 창문을 두드리는 촐삭댐 없이 조용히 켜켜이 쌓이기만 해야 하는데... 어? 바닥에 내리는 비의 축축함도 아니고 보송한 이불 위에 누워버리는 눈도 아니다. 투명하지만 단단하고 텅 빈 비 얼음이 눈 위로 튕겨져 나가며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옆으로 옆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비 사이로 선명한 사잇길들이 보였던 이유가 있었다. 비와 비 사이에 보이는 길은 부슬비를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아주 좁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사잇길이 보이지 않는다. 우스개 소리로 '빗 사이로 막가'라는 말이 있듯이 그만큼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눈 사잇길은 자세히 보지 않아도 된다. 일단 눈은 비처럼 투명하지 않고 고급진 우윳빛이라 선명한 배경과 대비되어 한 눈에 떨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아주 작은 사이즈로 내리는 눈은 눈과 눈 사이의 넓이도 비례해 사잇길도 똑같이 가늘다. 그런 가는 눈은 비처럼 얇게 내려 금방 녹으며 쌓이지 않을 확률이 높다.
반대로 눈이 펑펑 내리면 눈 사잇길도 넓어진다. 그런 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북이 쌓여 눈으로 세상을 하얗게 덮어 버리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펑펑을 견줄만한 단어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넙적하고 통통한 눈들이 옆도 보지 않고 하늘에서부터 지정된 것처럼 딱 그 자리로 사뿐히 사뿐히 내려앉아 겹겹이 쌓인다. 나뭇가지 사이사이 어디 하나 빈 구석 없이 틈틈이 살뜰히 채워 나가기 시작한다. 검다 못해 까맣게 마른 까마귀들 모양새로 언제 봄의 기운으로 푸른빛이 들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던 앙상하게 검게 그을은 겨울나무들이 새하얀 눈을 온몸으로 맞아들인다.
그렇게도 하얀 세상으로 온 대지와 온 세상을 덮어버리더니 이제 와선 얼음비로 쌓인 눈을 고정시키려나보다. 부드러운 솜털 같은 눈 위로 차갑고 푸른 얼음눈이 후드득 덮이면서 이제는 반짝이는 빛을 선사하려나 보다. 금빛 태양의 빛을 받은 눈 위의 얇디얇은 살얼음은 노란빛에 일렁이고 빨간빛에 너울너울 춤을 춘다. 드문드문 앙상한 검은 나무 사이로 석양의 빛이 검푸른 비단으로 휙 감더니 한달음에 진흙이 된다. 얼음빛도 석양빛도 새들의 흐느낌도 사라졌다. 검은 숲은 새들의 헛발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툭툭 부러져버리는 앙상한 가지들의 목넘김에도 의연하게 더욱 차가운 빛으로 밤을 새운다.
밤새 차가운 달빛의 기운을 받아 대지를 더욱 두텁고 단단하게 만들더니 빨간 태양의 위용은 감당하지 못하나 보다. 이른 새벽 다람쥐의 작은 발이 시리지 않고 슬쩍 눈 안으로 빠져 놀란 토끼눈이 되듯 빠르게 나무 위를 오르고 밤새 추위에 얼어 죽은 짐승 사냥에 허공을 가르는 민머리 독수리 떼가 다람쥐의 발걸음을 날갯짓으로 따라간다.
독수리의 눈보다 다람쥐의 잰걸음의 동네 마실 사냥이 더 신빙성이 있는지 독수리는 다람쥐보다 항상 한 발 느리다. 하긴 작지만 땅 위의 주인이 하늘의 주인에게 밀려선 안되지. 죽은 생명체에게는 육중한 몸놀림과 날카로운 발톱으로 날렵하게 체 가는 독수리지만, 산 자의 생명체에게는 다람쥐가 느끼는 대지의 떨림을 감히 감지하지 못하는 듯하다.
태양빛의 온도가 이 먼 귀퉁이, 내 코앞까지 그 열기를 내뿜으러 왔나 보다. 그 먼길을 단걸음에 왔는지 금새 눈과 얼음과 태양이 엉키고 합해져 뿌연 안개로 화답한다. 급하기도 하지. 음산하고 어둑한 숲 속에 숨겨진 태양의 기운이 스며나오는지 촉촉한 물안개가 보일 듯 말 듯 내 시야를 가리며 검붉은 숲 속을 가득 메운다.
뿌연 안개 숲과 함께 호흡하다 곧 봄이 올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아주 희미하게 숲 속 언저리에 물길이 보인다. 저 너머인데 곱게 쌓인 눈 사이로 투명한 비를 맞은 것처럼 푸른 봄이 번져나간다. 봄은 소리 없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누가 그랬던가? 봄처녀처럼 봄이 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