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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Dec 23. 2021

He, She or They 당신은 누구입니까?

조금은 불편한 진실

내가 처음으로 영어를 접한 건 초등학교 6학년 겨울 방학이었다. 지금이야 태어나자마자 알파벳을 들으며 옹알이를 하는 시대지만 몇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영어라면 그저 ABC 알파벳 송이나 읊조리며 나와는 상관없이 별나라에서 쓰는 외계어로 생각된 때가 있었다. 특히 한글에서는 굳이 생략해서 써도 무방한 주어지만 He, She, They, We등 반드시 문장의 처음을 시작하는 영어에서 주어의 역활은 그만큼 무게감 있게 다가왔다.


나와 너를 규정하는 말, 즉 주어를 대표하는 것은


그와 그녀 딱 두 가지로 정의했다. 나와 너 그리고 그들이 모여 우리가 되었고 거기에 더할 수 있는 주어는 더 이상 없었다. 그 누구도 그 이외의 주어를 생각해 보지 않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개중에는 남자인데 여자처럼 목소리가 살짝 하이톤으로 코맹맹 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모습도 계집아이 같아서 왕따를 당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가 살짝 불쌍해서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가 싸잡아 욕을 먹었던 경험 또한 그리 흔하지 않은 에피소드였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만큼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명확했고 그 정확한 범주 안에 누군가가 조금이라면 다른 행동과 생각을 가지면 즉각적으로 엄청난 사건을 경험해야 했다. 성의 구분을 벗어난다는 건 금기를 벗어나는 중죄에 해당하고 그러한 일은 인간으로 한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최악의 시나리오를 쓸 각오를 해야 하는 엄청난 일이었다.


35년을 살았던 한국에서 우리 상식 이상의 행동을 보이는 누군가를 직접 만나본 적이 없었다. 미국에 와서 한두 명 내 눈에 보였고 다른 사람을 통해 내 귀에 그러한 비슷한 말들이 들려왔다. 그 처음은 큰아이 발레 학원에서 만난 어떤 남자아이였다. 성에 대해 눈을 뜨지 못했을 것처럼 보이는 어린아이였지만 그 녀석은 게이라는 정확한 자기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게이가 자기임을 분명히 아는 것처럼 다른 사람과 다르지만, 결코 틀리지 않다는 걸 아이의 눈빛에서 그리고 행동하는 태도에서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 뒤로도 고등학교 캠프에 레즈비언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여자 둘이서 함께 호텔 방으로 들어갔다며 학교가 발칵 뒤집히는 일이 있었다. 미국 사회가 성에 대한 완전한 자유를 외치고 일정 부분 인정하는 분위기임에는 분명하지만, 같은 성끼리 호텔 방에서 머문다는 것 자체로 긴급회의를 하고 부모님께 알리고 결국 다른 방으로 배정했다는 사실은 남녀를 분명한 성의 잣대로 구분한다는 것이다. 미성년자라는 혼란한 시기를 어른의 눈으로 판단해 그들의 사고를 무참히 짓밟아 버리는 대단히 위험한 구분에 그들은 더욱 혼란한 성의 정체성에 놓여 있었다.



며칠 전에 우리 큰딸이 겨울 방학이라 집에 왔다. 평소에 이뻐하는 딸의 남사친의 안부를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너무 황당했다. 이태리계라 그런지 키도 크고 적당한 몸매에 눈이 그윽하고 잘생긴 편이고 머리도 스마트해서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조금은 욕심나는 사윗감이었다.


"요즘 000는 잘 있니? LA 가서 만났다며?"

"엄마, 000한테 파트너가 생겼어"

"파트너? 회사 다닌다면서 독립했데?"

"아니, 그런 거 아니고... 파트너가 생겼다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그럼 여자 친구 생긴 거네. 왜 파트너야?"

"엄마, 파트너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뭐라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그 파트너가 He나 She로 불리길 원하질 않아요. 그런 사람을 They라고 하는데..."

"They? 엄마가 생각하는 그 They? 그들?"

"응 엄마..."


그래서 알았다. He도 아니고 She도 아닌 사람을 They라고 한다는 걸 말이다. 이제는 사람에 대한 명칭도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어디 가서 실수하지 않으니 말이다. 게이는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고 레즈비언은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고 바이(bi-sexual을 줄여 bi바이라고 한다)는 여자나 남자가 두 성을 모두 좋아하는 사람을 말한다. 즉 바이는 분명한 자기의 성을 인식한 상태에서 같은 성도 좋아하고 다른 성도 좋아하는 즉 양성애자를 말한다. 하지만 데이(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지칭할 때 보통 영어에서는 They라 하고 그래서 생긴 말이라 한다)는 자기 자신이 두 가지 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양성애자인 바이와 다르다.


사람이 태어나면 두 성 중의 하나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 이후에는 태어난 성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성 정체성에 눈을 뜨면서 자기의 성에 관한 명확한 시선을 가지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태어난 성을 따르는 게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 여자로 태어났지만 남자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 여자로 태어나서 여자나 남자 모두를 좋아하는 사람, 여자로 태어났지만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두가 자기안에 있는 사람 등등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라 해석해야 한다. 모두가 똑같이 보통으로 한다고 해서 그것이 옳고 다름이 틀린 것이 아니다. 그냥 보통과 다른 것이고 다르기 때문에 독특하고 그 독특함을 인정해 줄 때 우리는 건강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그냥 보통으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보통으로 사는 삶이란..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하고 아이 낳고 아이를 키우며 행복을 느끼고 학교 보내고 함께 늙어가며 생을 마감하는 삶을 우리는 보통으로 살다 죽는 인생이라 말한다. 나 또한 그런 삶을 꿈꾸었고 얼추 그런 보통의 삶을 살고 있다.


어릴 때의 나는 보이시하다는 말을 들었고 여자다운 여성성보다는 털털하고 섬세하지 않은 행동으로 오히려 여자들의 관심을 받았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만약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 또한 나의 정체성을 찾다가 어쩌면 데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되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성의 혼란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 숨죽이며 다름의 피해자로 평생을 살았음에 틀림없다.


미국에 살다 보니 인종에 대해 말뿐이 아니라 직접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다. 하느님께서 무지개 7가지 빛깔로 빚어 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원망하며 딱 세 가지 인종으로 나누어져 허구한 날 사람의 피부색으로 싸우고 죽고 비방하고 헐뜯으며 이 나라가 돌아가고 있다. 그 인종의 다양함 만큼이나 성의 다양함이 존재함을 인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인종은 리적으로 피부색이 다르기에 우리가 생각하고 방어하고 그리고 표현함에 있어서 명확하게 대처할  있지만, 성은 정신적인 부분과 결합 되어 겉으로 나타내기가 참으로 어렵다. 얼마  CNN 뉴스 앵커 앤더슨 쿠퍼가  소수자의 대표자로서 대리모를 통해 득남을 했다 해서 해외 토픽화 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각주마다  소수자에게 무지갯빛 깃발을 흔들며 정당하게 헌법을 개헌하고자 노력하는 일들이 일상이 되었고 동조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가고 있어 다행이다.  소수자(Queer) 성에 있어서  종류가 아닌 다른 성에 대한 모든  포함하는 함축된 단어로 성의 소수자란 말을 쓴다.


그만큼 우리가 보이는 게 다가 아닌 성의 개방 시대에 살고 있다.


위에서 말한 보통사람의 삶이 내가 산 시대에는 그래여 했던 것이 지금의 보통 삶은 시대가 흐르고 바뀐 만큼의 간격으로 생각 또한 바뀌어야 한다. 태어날 때는 생리적으로 남자와 여자 두 가지로 구분되지만 성장하면서 성 정체성을 거치며 제2의 성을 스스로가 선택하는 그런 일이 이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이런 말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불편하고 듣기 싫은 말일 수도 있겠다. 게이나 레즈비언들이 깊은 상처를 받는 이유가 가장 가까운 부모나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한 슬픔이 무엇보다도 크기 때문이다. 가족이 그러할진대 타인에게 받는 상처는 오죽할까?


이는 꼭 기성세대나 라테 세대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젊은 사람이나 같은 성끼리 이러한 일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고 시선을 돌리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인종도 아니고 나이도 아니고 그저 생각하는 사고가 다를 뿐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인정을 하기만 하면 될 일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춘기를 거치는 청소년이나 화병의 극치를 달리는 갱년기의 엄마를 바라보는 딱 그 정도의 시선으로만 성 소수자를 바라보면 어떨까? 그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고 받아주는 거..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지 않듯 남자가 남자를,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데 있어서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진정하게 평등한 세상이다.


인종차별이 그리고 성차별이 지금도 곳곳에 넘쳐난다.


지구에 인간이 생기면서 갈등을 빚어온 피부색의 다름이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하소연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성에 있어서 자기 나름의 아이덴티티를 찾아 태어날 때의 성에서 나의 진짜 성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그 어떠한 비난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 누가 가지고 태어난 성을 일부러 바꾸고 싶겠는가? 우리는 그러한 성 소수자를 비판할 자격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면 우리도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21세기가 성으로 혼란한 시기임에는 분명하지만, 더욱 분명한 건 괴테가 파우스트를 썼던 18세기에도 세상이 혼란으로 가득해서 악마와 천사를 희곡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회를 비판했고 예수님이 태어나심도 세상이 혼돈으로 가득 차 세상을 구하고자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세상 한가운데 놓으시고 죽음으로 세상을 맑게 하고자 하셨다. 성 소수자는 기원전에도 존재했고 화성으로 가기 위해 티켓을 사는 21세기에도 존재한다.


다만 그때도 숨죽여 있었고 지금도 숨죽이고 있지만, 그들이 한 발씩 앞으로 나오고 있다는 건 확실하다. 성차별이 단순히 여자를 남자들이 차별하는 것만이 아니다. 보통 사람이 성소수자를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 또한 성차별이다. 피부색을 우리의 의지대로 만들 수 없듯이 성도 우리의 생각대로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만 확실히 안다면 그들을 대하는 시선이 달라지지 않을까? 그들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것 또한 보통사람들의 몫이다.


이제는 젊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어봐야 한다.

"남자 친구 있니? 혹은 여자 친구 있니?"라는 남녀의 관계 물음이 아니라,

"사귀는 사람 있니? 혹은 파트너 있니?"라는 좋아하는 사람의 관계 물음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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