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초록은 매혹적이다. 내 옷장 속에서 녹색의 비중이 상당한 것을 보면 적어도 나는 초록색에 무의식을 지배당하고 있는 듯하다. 독일 슈바르츠발트(검은 숲)의 짙다 못해 검푸른 초록도 좋고, 에메랄드 빛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물 색깔도 황홀하다. 요즘은 산책 때마다 만나는 싱그러운 초록색 덕분에 행복하다.
한국에서 3월 개학 때 교정이나 캠퍼스에 가득한 녹색을 보며 어른이 됐던 나는 3월부터는 곧 봄, 즉 도처에 가득한 초록 그리고 꽃들이 지극히 당연했다. 어쩌면 새 학기, 새 학년이 된다는 분주함에 계절의 변화는 내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신없이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어, 벌써 봄이네!" 이러지 않았나 싶다.
한국보다 봄이 늦게 도착하는 독일에서는 3월쯤 서서히 자연이 희미한 초록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여기서는 3월부터 4월까지 겨울이 봄이 되는 과정이 마치 슬로모션을 보는 듯 한국과는 전혀 다른 운동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지팡이 하나로 신데렐라를 변신시켜주고, 호박마차를 마련해주는 듯 짠~하고 다가오는 게 봄인 줄 알았는데, 이 곳의 봄은 달팽이처럼, 그렇지만 자기 딴에는 매우 열심히, 치열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더 이상 새 학기, 새 학년이라는 게 없는 지금은 봄이라고 해서 색다른 이벤트가 없다. 3월과 4월은 2월과 별 다를 바 없는 그저 일상의 연속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자연이 내게 보여주는 연한 초록색이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다. 이제 5월이 되면 사라져 버릴 그 여릿한 초록색이기에 더 애틋하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어린것은 다 예쁘고 귀엽지 않은가. 그 미성숙함의 아름다움이 이렇게 깊이 느껴질 정도로 나도 나이를 먹은 걸까?
산책하다가 집 근처 김나지움(독일의 중학교+고등학교) 벽면에 가득 걸린 현수막들을 보게 됐다. 아비투어라고 해서 독일의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을 응원하기 위한 현수막이다. 유례없는 전염병 시기에 입시를 앞둔 아이들이었지만, 현수막을 보면 참 유쾌하다. 이 아이들은 훗날 이 시기를 추억하며 얼마나 웃음 짓게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