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문장은 월드스타 강모 배우님이 하셨던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들었는데, 지금도 기억날 만큼 인상적이었나 보다. 물론 일본어 '가오'는 요즘 시국에 적절하지 않은 단어지만, 문장 그대로 인용하는 게 화자의 심정을 더 적나라하게 표현해주는 듯하다.
그렇다. 예술가는 굶어 죽어도 '가오'가 있다. 다른 말로는 자존심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폼? 아무튼 '가오'하면 딱 떠오르는 분은 가수 나훈아 님이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그를 불렀는데, 거절하고 자신의 노래를 듣고 싶으면 공연장으로 오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분의 평소 언행을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 같다.)
옛날 일화 1.
예전에 독일 분이랑 결혼하시고 그 동네 지역사회에서 굉장히 정열적으로 활동하시는 어떤 분이 "그냥 밥이나 먹으러 와요"라고 우리 부부를 초대한 적이 있다. 순진했던 우리는 그걸 곧이곧대로 듣고 밥 먹으러 간 적이 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자리는 그분의 생일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생일이라고 말하면 내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밝히지 않은 것은 아닌 듯했다. 설령 그런 의도였다고 하더라고 다음의 해프닝 때문에 그분의 생일잔치는 내게 당혹스러운 경험으로 남아버렸다.
식사를 어느 정도 마친 후, 그분은 사람들 앞에서 내게 노래 부를 것을 종용했다. 자신의 독일 친구들 앞에서 뭔가를 자랑하고 싶은 심산이었을까? 나보다 한참 어른이었고, 그동안 그분 덕에 여기저기서 노래로 용돈도 벌었기에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중 가수든, 성악가든, 또 그게 밥상 앞이든, 그 어느 자리든 간에, 미리 약속된 경우가 아닌데 노래를 막무가내로 청하는 것은 실례다. 조수미 님도 오래전에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밥 먹는 자리에서 누가 노래시키면 포크로 확 찍어버리고 싶더라고요." 너무나 인상적인 구절이라서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이후로는 누군가 내게 비슷한 상황에서 노래를 청하면 "조수미 님이 이렇게 이야기하시더라고요...." 하면서 위의 구절을 인용하여 상황을 정리한다.
차라리 나를 초대한 그분이 처음부터 솔직하게 "내가 지나씨 노래 좋아하잖아요. 혹시 내 생일날 와서 날 위해 노래해 줄 수 있나요?"라고 '미리 부탁'하셨으면, 그분이 의미 있는 날에 나를 선택하셨음에 기뻐서 기꺼이 대가 없이 노래해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어깨뽕 뿜뿜을 위해 '성악가'스러운, 조금 더 센스 있는 의상을 준비하고, 그 분위기에 어울리는 곡을 선곡해서 갔었을 것이다.
'성악가'로 누군가의 앞에 선다면, 밥 먹다가 허둥지둥 목이 메면서 가사도 가물가물한... 그런 엉성한 모습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바로 그게 예술가의 '가오'인 것이다.
하다못해 조기축구를 뛰어도 준비운동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 그런데 밥 먹고 나서 바로 노래하라니... 체하는 줄 알았다. 우리는 주크박스가 아니란 말이다. '프로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라고 물으시면 '당신은 프로의 노래를 듣기 위해 얼마만큼의 성의를 마련하셨냐'라고 반문하고 싶다. 혹은 '뭐, 이렇게 까다롭게 굽니까?'라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 수준이 그 사람의 한계라고 생각하고 조용히 손절하련다.
이 글을 쓰면서 떠오른 또 다른 일화.
쾰른에서 가난한 유학시절을 보낼 때, 생활비를 벌 수 있던 것은 한인식당에서 하는 서빙 아르바이트 덕분이었다. 그 식당은 쾰른 시내 목 좋은 곳에 위치해서 주말에는 웨이팅 줄이 길고, 손님의 대부분이 독일인들이었다. 주인 할머니가 어마어마하게 무서우신 분으로 유명했는데, 내가 간장 종지부터 와인잔까지 가게 안의 모든 깨질 것들을 차례대로 다 깨뜨리는 걸 보셨음에도, 나를 자르지 않고 계속 써주셨다. 그때는 엄청나게 혼났지만 그래도 지금은 참 감사하다. 덕분에 유학생활을 버틸 수 있었으니까. 아무튼 그분은 손님들에게도 거침없이 할 말 다 하시는 것으로 유명했다.
규모가 큰 식당이었기에 가끔 한국인 단체손님이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경우는 2층으로 따로 올려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의 딸인 작은 사장이 나더러 위에 올라가서 노래해보라고 반농 진농으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가서 용돈이나 벌라고 하는 악의 없는 말이었고, 나도 그때는 가난한 유학생일 때라 내심 혹하기도 했다. 20-30 유로면 일주일치 식비를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이때, 상황을 딱 정리하신 분이 바로 호랑이 할머니, 즉 큰 사장님이었다.
"그런 데서 노래하라고 여기서 공부하는 거 아니야!"
사실 큰 사장님은 젊었을 때 한국무용을 하셨던 분이셨다. 그렇기에 예술가의 자존심을 잘 아시는 분이었고, 그 덕에 '자존감'이 형성되지도 않은 풋내기 유학생을 지켜주셨다. 그분의 개인사는 잘 모르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외로운 분이셨던 것 같다. 가게 앞에는 그분이 항상 담배를 피시며 행인들을 지켜보는 의자가 있었다. 왜 그렇게 몸에 좋지 않은 담배를 많이 피우세요?라고 누군가 물었더니, "담배가 가장 친한 친구야"라고 답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너무 많이 혼나서 어려웠지만, 지금 뵈면 넉살 맞게 인사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예술에 그 자체로 탐닉하는 진정한 '애호가'들도 많지만 그런 척하는 졸부들도 간혹 본다. 자신은 물질적인 풍요 외에도 예술이라는 남다른 기호가 있음을 자랑하고 싶어서 거실장에 모네, 프리다 칼로, 에곤 실레의 두꺼운 도록을 인테리어 포인트로 뉘어서 각도 맞춰 모셔놓으시고는, 음악가들을 불러 하우스콘서트를 갖는다. 그래 놓고는 자신이 부른 그 음악가들이 어떤 경력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곡을 연주하는지 배경 지식이 전혀 없고, 게다가 앉을자리도 마련해놓지 않아서 킬힐을 신은 손님들이 서서 음악을 감상하게 방치한다. 지들은 비싼 소파에 앉아 있으면서 말이다. 그놈의 소파 등 가구 위치를 바꾸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 (모든 공간이 치밀하게 인테리어 콘셉트를 지키기 때문에) 덕분에 초소형 스타인웨이 업라이트 피아노는 거실 가구 중 하나처럼 구석에 처박혀 있다. 콘서트라는 것에 전혀 이해가 없이 라이브 음악을 자신의 파티에 블링블링한 액세서리 아이템 중 하나로 취급하는 그 몰상식과 허영심에 치를 떨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내 '가오'는 남들이 알아서 세워주지 않는다. 물질적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내 가치를 지키는 것은 나 아닌 누구도 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