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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 Mar 09. 2022

"그 사람은 괴물이 아니었어요."

안나 네트렙코, 그리고 푸틴 

"그 사람은 괴물이 아니었어요. 그녀는 말했다. 사람들은 그이를 괴물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그 여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을까? 아마 틀림없이 별생각 없었을 거다. 옛날에도, 인터뷰할 당시에도, 어떻게 하면 생각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을 거다. 시대가 비정상이었다. 


(중략)


누구에게든 인간성을 만들어 붙이기란 정말 얼마나 쉬운 일인가. 얼마나 손쉬운 유혹인가. 몸만 어른이지 마음은 아기라고, 그 남자를 보며 여자는 마음속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마음이 약해져서, 앞이마에 흘러내린 그의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겨주고 귀에 키스를 해 주었으리라. 단순히 대가에 혹해서 그런 건 아니다. 토닥여주고 싶은 본능, 더 낫게 만들어주고 싶은 본능. 남자가 악몽을 꾸고 잠을 깨면 그녀가 자, 이제 괜찮아, 괜찮아요 하며 말해 주었을 테지. 당신 요즘 너무 힘든가 봐요. 전부 진심이었겠지. 안 그랬으면 어떻게 삶을 지탱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그 미모 밑에 숨은 그녀의 참모습은 정말 평범했다. 그녀는 예의 발랐고, 유태인 하녀에게도 친절했다. 아니, 친절을 아주 넉넉히, 필요 이상으로 베풀었다."


위 내용은 마거릿 애트우드 작, <시녀 이야기> 중에서 주인공이 어릴 적에 TV에서 봤던 어느 여인의 인터뷰를 회상하는 장면인데, 그 여인은 유대인을 학살했던 수용소 감독의 정부였다.


나는 위의 페이지를 읽으면서 요즘 클래식 음악계에서 뜨거운 이야깃거리인 러시아 출신의 스타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가 떠올랐다. 

그녀는 이른바 '푸틴의 음악가'로 찍혀서 입장 표명에 대한 압력을 받았고, "전쟁에 반대한다"라고 밝혔지만, 푸틴을 반대한다고는 하지 않았기에 뉴욕, 밀라노, 뮌헨 등 전 세계 최고의 오페라하우스에서 쫓겨났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향후 몇 달간의 콘서트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왜 예술가에게 정치적인 입장을 강요하느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런데 네트렙코의 조국인 러시아가 배출한 위대한 작가 톨스토이는 그의 저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사람이 진정한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데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그 사람은 (1) 동시대 최고의 세계관의 수준에 서 있지 않으면 안 되고, 또 (2) 감정을 경험하고 이를 전달하는 욕구와 가능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되며, (3) 어떤 종류의 것이건 예술에 대한 재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넵트렙코가 2번과 3번은 넘치도록 가지고 있다는 것에는 일말의 의심이 없다. 

그렇지만 동시대 최고의 세계관...... 과연 이것은 무엇일까? 

이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과연 안나 네트렙코는 톨스토이가 말하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예술가인가? 


성악가답지 않은(!) 늘씬하고 아름다운 미모로 데뷔 때부터 화제가 됐던 안나 네트렙코. 이전의 성악가들과 다르게 그녀는 우아한 신비주의 속 디바에 머물지 않고, 팬들과 SNS 같은 수단을 통해 적극적으로 소통했다. 라이브에서 자신이 어떤 화장품을 쓰는지, 자신이 무엇을 먹는지 시시콜콜하게 공유했다. 그리고 그녀의 인스타그램에는 예술가의 고뇌, 치열한 노력보다는 화려한 생활을 하는 어느 셀럽으로서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https://youtu.be/KZlPG91IRps

수많은 소프라노들이 이 노래를 부르게 만든 전설의 영상. 레하르의 오페레타 <쥬디타> 중 "내 입술은 뜨겁게 키스해요(Meine lippen sie küssen so heiß)"


출산을 하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녀를 상징하던 젊음과 아름다움은 빛이 바래갔다. 그렇지만 그녀는 오히려 체중을 증량하고 드라마틱한 레퍼토리에 도전해서 그녀의 가수 인생에 새로운 챕터를 추가했다. 한 때는 그녀를 끼 많은 엔터테이너 정도로 치부하던 대중들도 이제는 '디바'로 대접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그녀와 같이 공연한 동료들에 의하면 그녀는 전혀 '디바'스럽지 않고 '나이스'하다고, 즉 사람이 좋다고 한다. 그런 그녀이기에 푸틴에게는 일종의 의리를 지킨 것일 테다.

 

"나는 러시아인이고 조국을 사랑하지만 우크라이나에는 많은 친구가 있고 고통과 비애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 전쟁이 멈추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기를 바란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고, 내가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내놓은 입장이었다. 


"예술가나 공인이 정치적 견해를 알리고 조국을 모욕하도록 강요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이것은 자유로운 선택이어야 한다. 나는 정치가가 아니고 예술가이며 내 목표는 정치적인 차이를 넘어서 단결하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알리고 이제까지 부와 명예를 쌓아온 과정, 또 우리 시대가 그녀를 소비한 방식은 엄청난 재능을 가진 셀럽 혹은 연예인에게 대하는 그것 아니었나? 그런데 갑자기 그녀에게 '동시대 최고의 세계관'을 요구한다. 왜? 그녀가 세계 최고의 스타 소프라노이니까. 모두가 그녀의 입을 주목한다.


그녀의 위상과 시대의 요구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태평성대에는 그녀가 제공하는 엔터테인먼트에 만족도가 높았다. 그런데 환란의 시대에는 엔터테인먼트 플러스알파가 요구된다. 여전히 안나 네트렙고는 최고의 인기에 그 기량도 여전하건만, 그녀를 둘러싼 상황이 변했다. 


문득 나는 달이 차면 지고, 꽃이 피면 지는 자연의 섭리가 떠올랐다. 어화 둥실 환하게 빛나는 오늘의 보름달은 내일부터 한쪽 면이 기울게 된다. 오늘 가장 찬란하게 피어있는 이 꽃은 내일부터 그 탄력을 조금씩 잃어가게 될 것이다. 저 달이 지구 주변을 하루 주기로 도는 것은 변함이 없는데, 우리 눈에는 매일 다르게 보인다. 이 꽃이 지면 다른 꽃이 필 것이고, 더 이상 피어날 꽃이 없이 다 지고 나면, 모두 잠드는 겨울과 약속을 어기지 않는 봄이 올 것이다. 


넵트렙코라는 가수도 하나의 꽃이기에 발아하고, 몽우리가 생기고, 꽃잎을 새초롬하게 펼치기 시작하다가 어느덧 활짝 피어서 그 향기를 그윽하게 내뿜는 순간이 있었다. 그 향기를 맡게 되면 - 그녀의 목소리를 실제로 듣게 되면 - 팬이 되지 않기는 힘들다. 혼자만 마이크랑 우퍼를 따로 달고 있는 것 같은 신기한 소리이기 때문이다. 오페라에서 등장만으로 박수를 받는 가수는 흔하지 않다. 그녀의 공연은 언제나 일찌감치 매진이고 티켓값도 후덜덜하지만 언젠간 꼭 다시 보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이왕이면 남편이랑 하는 원 플러스 원이 아닌 그녀와 걸맞은 환상적인 캐스팅으로 말이다.) 50대에 접어든 그녀이지만 탁월한 기량을 가진 그녀이기에 앞으로 길면 10년은 더 최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푸틴이라는 변수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번 사건이 그녀의 긴 성악가 인생에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지, 아니면 그녀의 전성기에서 내리막길로 꺾어지는 변곡점이 될지는 더 두고 봐야 할 듯하다. 전자라면 그녀의 새로운 챕터에는 어떤 내용이 쓰일지 궁금하고, 후자라면 부디 그 내리막길이 완만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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