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na Sep 17. 2019

개인을 갈아 넣지 않는 사회

오페라 보러 가서 독일과 한국의 차이를 생각하다

공연은 저녁 7시 반에 시작한다. 나는 당일 현장 구매를 위해 이미 거의 20분 이상 매표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내 앞의 줄은 도통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인다. 속된 말로 x 줄이 슬슬 타려 한다.


어느덧 공연 10분 전을 알리는 종이 친다. 하지만 내 앞의 줄은 요지부동이다. 미리 예매한 티켓을 찾으려는 관객과 나같이 현장 구매하려는 관객, 그리고 마침 오늘 개막하는 다른 연극 공연을 보고자 하는 관객까지 한데 모여서 긴 대기줄을 이루고 있다. 매표소를 담당하는 두 중년 여인은 베테랑으로 보이는데, 자신의 업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친절한 미소와 함께 가끔 농담도 던져가면서 말이다. 이 길고 긴 대기줄을 보고도 그런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빨리빨리"의 나라에서 온 이방인의 눈에 몹시 신기하다.


이제 공연 5분 전을 알리는 종이 친다. 그런데 내 앞의 줄이 줄어드는 속도는 점점 늘어나는 대기줄의 길이에 비해 턱없이 느리다.


하지만 독일 생활 12년 차 이방인의 눈에는 누구 하나도 언성을 높이거나 짜증을 내지 않는 게 너무나 신기하다. 데스크에 앉은 두 숙련된 여인은 일말의 조급함 없이 평온함을 유지하며 고객을 응대하고 있다. 대기줄에 서있는 관객들 중에는 줄어들지 않는 줄에 관해 걱정을 하고 있긴 하지만 거기에 분노 같은 격한 감정이 있지는 않다. 이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감정을 표출한다 한 들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냉정하게 꿰뚫고 있는 독일인의 국민성 덕분일 것이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좌석 선택의 망설임 같은 건 다음으로 미루고, (오페라 애호가로서의 연륜을 믿고) 대충 중간 정도 좌석을 골랐다. (도시마다 있는 독일 국립극장의 티켓 가격이 충분히 감당할 수준이라는 믿음도 있으니까.) 나를 담당한 매표소의 그녀는 아주 여유 있게 좌석을 확인하고, 티켓을 출력하며 또 카드로 결제를 완료했다. 그 모든 과정에 서두름은 없다.  앞으로 공연이 시작하려면 1시간은 남은 것 같은 여유로움이었다. 비록 나에게는 카드 결제 버튼을 누르고 신호를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조차 억겁의 시간 같았지만...


나는 다행히 제 시간 안에 입장할 수 있었고, 공연은 15분가량 늦게 (따로 공지도 없이) 시작했다. 독일인의 규칙 준수력을 생각하면 매우 예외적인 일이다. 매표소에서 발이 묶여 입장하지 못한 관객들을 기다리기 위해 공연 시작이 지연됐다고 사료된다. 어쩌면 이 날은 유독 관객이 몰린, 극장 측으로서는 대박이 난 날일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2명이서 무리 없이 처리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전에 내가 방문할 때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3명 혹은 4명이 해야 할 일을 2명이서 해치우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을 미리 대비하고 인원을 더 배치했어야 하는 시스템의 문제지, 본인의 역량으로 해결하면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2명이서 4명의 일을 해치운다고 해서 누가 보너스를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1명이서 2명분 일 한다고 월급이 2배 되는 거 아님..... 맞죠?


얼마 전에 일본이 불화수소를 비롯한 몇 가지를 수출 규제하는 바람에 온 나라가 한바탕 몸살을 겪었다. 지금은 다른 조달처를 확보하는 등 위기가 극복됐다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그때 온 국민이 느꼈던 분노와 걱정은 아직도 모두에게 생생할 것이다. 그때 "엔지니어들을 갈아 넣으면 이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곧 해결될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정말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잘 해결되었다. 나는 그 반도체 업계 생리를 잘 모르지만, 그 비상사태에 담당 엔지니어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희생했는지는 상상할 수 있다.


뜬금없이 수출규제 사건을 꺼낸 이유는 대의를 위해 개인을 갈아 넣는 일이 당연시되지 않는 사회가 되길 바라는 것이 첫 번째이고, 같은 맥락에서 4명이 할 일을 2명이서 해치우는 일이 독일에서는 비정상적이다 라는 걸 소개하고 싶어서이다. (물론 그 '비정상적'인 일이 독일에서 발생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인식 자체가 한국과 조금 다르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여러 여건상 2명이서 4명 몫의 일을 해내야 한다면, 그에 응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오페라를 보러 가서 오페라 아닌 다른 생각도 하는 이방인은 여기까지! 더 깊이 들어가는 건 다른 사회과학이나 노동 전문가들에게 패스! 한국인으로서 독일 사회에서 느끼는 차이점을 앞으로도 기록해 볼 요량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미스터리 한 동반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