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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 군부대에서

by 다몽 박작까

오늘은 남양주에 있는 군부대에 다녀왔다. 원래는 오전 강의였다. 아침 일찍 전화가 울렸다. 눈을 뜬 지 얼마 안 된 시간이었다.


"강사님 혹시 아직 출발 안 하셨나요? "


전화기 너머로 숨이 찬 목소리가 들렸다.


"다름이 아니라 눈이 너무 많이 와서요. 군인들이 지금 눈을 치우느라... 혹시 오후로 변경 가능할까요?"


나는 잠깐 창밖을 봤다. 밤새 쌓인 눈이 그대로였다. 차 위에도. 인도에도. 세상 위에도.


"아, 그럼요."


대답은 빠르게 나갔고 마음속에서는 솔직한 생각이 따라왔다. 다행이다. 눈 오는 날 아침 운전은 늘 긴장되니까.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차가 아니라 마음이 먼저 미끄러진다.






시간은 오후로 바뀌었다. 눈은 조금 그쳤지만 도로는 여전히 미끄러웠다. 조심조심. 정말 아슬아슬 도로를 달렸다. 30분 거리인데 50분쯤 걸린 듯하다.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은 이것만으로도 할 일 다 했다.'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운전은 체력과 신경을 동시에 요구한다.


군인들이 눈을 치우고 바로 강의를 들으러 온다니. 솔직히 걱정이 됐다. 다들 지쳐 있지 않을까. 고개가 떨어지고 몸만 의자에 얹어 놓은 상태는 아닐까.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눈에 먼저 들어온 건 젖은 군화와 살짝 헝클어진 군복들이었다.


"눈 많이 치우느라 힘드셨죠?"


인사처럼 던진 말에 한 군인이 말했다.


"예. 트럭 세 대 정도 치웠습니다."


그 말투가 꼭 '저 오늘 진짜 고생했어요.' 하고 말하는 어린아이 같아서 괜히 웃음이 났다. 어리광 같았고 그래서 더 귀여웠다. 사람은 고생을 너무 많이 하면 괜히 어른인 척을 못 한다. 그게 나쁘지 않다.






강의는 생각보다 잘 흘러갔다. 교육내용이 응급처치와 심폐소생술이어서 실습도 있었다. 다들 집중해서 듣다가 깜짝 퀴즈에 반응도 하고 질문도 해주었다. 하지만 중간중간 고개가 떨어지는 군인들이 보인다. 꾸벅. 또 꾸벅. 오늘은 그게 싫지 않다.


'그래. 오늘은 그럴 만하지.'


나는 가르치기보다는 달래는 쪽을 선택한다.


"조금만 더 힘내봅시다. 오늘 하루 아침 일찍부터 진짜 길었잖아요."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인다. 교육 장소가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마이크 없이 강의를 하게 됐다. 예전 같았으면 당황했을 텐데 지금은 아니다. 다행히 공간이 크지 않았다. 목소리를 조금 더 쓰면 되었다. 이런 순간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먼저 적응한다. '아, 경험치가 또 쌓이네.' 싶다. 장소도, 대상도, 상황도. 강사는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늘 적응 중이다.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 부대가 워낙 커서 눈 쌓인 길을 헤매다 잠시 길을 잃었다. 같은 건물. 비슷한 길. 비슷한 풍경. 돌고 돌아서야 출구를 찾았다. 출구 근처에서 군인들이 여전히 눈을 치우고 있다. 한쪽에서는 빗자루와 삽으로 묵묵하게 눈을 치우는 군인들. 말이 없고 동작이 일정하다. 다른 한쪽에서는 눈은 거의 안 치우고 열심히 눈싸움을 하며 장난치는 군인들. 눈을 던지고 피하고 웃고 있다. 다 똑같은 군복에 귀에는 군밤장수 귀마개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이 왜 그렇게 귀엽던지. 같은 공간. 같은 임무. 그렇지만 전혀 다른 표정. 문득 우리 아들이 떠오른다. 우리 아들도 언젠가 저 나이가 되면 눈을 치우다가 분명 저쪽에 섞여 눈싸움을 하고 있겠지. 그 상상을 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진다.


오늘 강의에서는 내용보다 사람이 더 기억에 남는다. 눈을 치우고도 웃을 수 있는 얼굴들. 피곤해도 자리에 앉아 주는 태도들. 그리고 강의를 들으면서 끝까지 버텨준 눈빛들. 눈 오는 날의 군부대는 조금 힘들고 많이 귀엽고 생각보다 따뜻했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며 나는 조용히 생각한다. 오늘도 무사히 끝났다. 큰 성취는 없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그래도 눈 오는 날을 피하지 않았고 상황을 탓하지 않았다. 주어진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했다. 이런 하루들이 쌓여 경력이 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조금 더 경험치가 쌓인다. 아주 조용하게 높이 쌓이는 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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