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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잊지 못할 '그날'의 강의

by 다몽 박작까


그날 군부대 강의는 아마 평생 못 잊을 것 같다.


강의 주제는 '마약중독'


마약 중독 강의를 할 때는 강의 끝에 종이비행기를 날린다. 종이에 마약을 하지 말자는 다짐 같은 걸 쓰고 함께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선언하는 거다. 오랜만에 마약 중독 강의라 A4용지 한 뭉치를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갔다. 반복된 강의로 자신감이 조금은 붙어있을 때였다. 이 말은 곧 오늘은 비교적 평온하겠지 라는 희망이었다. 하지만 희망은 대체로 입구에서 꺾인다.


강의장에 들어가자 맨 앞줄에 딱 봐도 연륜이 묻어나는 분이 앉아 계신다. 설명은 필요 없었다. 아. 이 분은 높은 분이다라고 직감했다. 이 분은 바로 대대장님이었다. 500~1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 대대장님이 맨 앞에 앉아 계신 것만으로도 온몸이 자동으로 굳어진다. 그런데 대대장님은 강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한마디를 더 얹으신다.


"저기 마약중독 강의를 굳이 해야 돼요? 우리 부대에는 마약중독자도 없는데."


아. 시작부터 주제가 흔들린다. 교육 담당자의 요청으로 준비한 필수 교육이라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대신 도박중독 강의도 함께 준비했다고 말씀드렸더니 그걸 하라고 하신다. 이쯤 되면 종이비행기는 이미 격납고에 들어갔다.






강의는 시작됐지만 시작되자마자 계속 멈춰졌다. 대대장님의 브레이크가 계속된다.


"강의 끝나고 하는 훈련시간이 앞당겨졌으니 길게 하지 마세요."

"내용은 다 아니까 질문 시간을 길게 갖죠?"

"이건 굳이 안 봐도 되겠네요. 화면 넘겨주세요."

.

.

.

강의는 점점 70여 명의 군인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대대장님 한 명을 위한 개인 레슨처럼 변해갔다.


도박중독 강의가 끝나고 마약중독 강의를 시작했을 때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이건 안 해도 되겠네."

"이건 넘어가죠."


강의를 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강의를 빼앗기고 있었다. 배려와 매너가 빠진 통제는 생각보다 빠르게 마음을 말려갔다. 그리고 나는 이방인이었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 앞에 혼자 서 있었다. 도움을 청할 대상도, 상황을 건너줄 사람도 없었다. 그제야 알았다. 소리 없는 통제가 사람을 얼마나 쉽게 지치게 하는지. 고립이 얼마나 빠르게 마음을 잠식하는지를.



자기 기준의 조언을 여과 없이 내뱉는 것.

결국 그것은 관계의 미묘한 거리를 무시한 채 경계를 함부로 침범하는 행위다.



이은경 작가의 책 [쓸 때마다 명랑해진다] 중






분명 두 시간 강의였는데 끝났을 때는 겨우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 한 시간은 인생에서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려 시선을 들 수 없었고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주섬주섬 노트북을 챙기고 있는데 대대장님이 다가오신다. 강의도 일찍 끝났으니 대대장님 방에서 티타임을 갖자고 하셨다. 내키지 않았지만 강의도 일찍 끝났으니 핑계될 게 없어 따라갔다. 잔뜩 상기된 채 방에 들어갔다. 앉자마자 대대장님은 강의 중 아쉬웠던 점을 말씀하신다. 칭찬 없는 피드백은 시험지 같았고 그 시험지는 사람을 작아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3년 뒤 퇴직 예정인데 강사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강의가 있으면 다 들어보는 중이라고. 그러면서 강의 자료는 어떻게 구했는지. 어디 소속인지. 행안부 공무원인 건지 등등 질문이 이어졌다. 계속 물어보기만 하니 민망하셨는지 다른 말도 하신다. 강사는 프리랜서라 불안정하니 군무원이 훨씬 나을 거라며. 휴직이 3년이나 된다는 팁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초등 두 아들이 있어 더 이상 출산휴직은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껴두었다.)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강의보다 밀도가 높았다.






돌아오는 길에 멘탈이 탈탈 털렸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지금까지의 강의들이 얼마나 순조로웠는지. 얼마나 배려받고 존중받아왔는지를. 만약에 첫 강의가 오늘 같았으면 어땠을까? 아마 나는 지금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강의 사진도 못 찍고 종이비행기도 못 날리고 준비해 온 초코파이는 하나도 못 나눠드렸다. 몸보다 마음이 훨씬 더 고단한 하루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했지만 그 안에서 나는 오래도록 나를 붙잡고 있었다. 며칠 동안 그 장면에 마음이 묶여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매몰되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가길 바랄수록 그 순간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돌이켜보면 너무 무례한 상황이었고 그때의 내 대처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래서 같은 일이 다시 생긴다면 어떻게 행동하고 대처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수없이 되짚어 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곱씹는 시간 속에서 이상하게도 점점 확신이 들었다. 그날은 분명 힘들었지만 결국에는 내 강사 인생을 단단하게 만들어 줄 중요한 경험치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모든 강의가 나를 성장시키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그날 같은 강의가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그날처럼 종이비행기 대신 멘탈을 접고 돌아올 때, 비로소 나를 오래도록 지탱할 힘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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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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