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X에 다녀왔다. 군부대 강의를 마치고 나오던 길이었다. 아침부터 이어지던 이동과 준비. 강의실의 공기. 집중한 얼굴들. 질문에 답하느라 계속 긴장하고 있던 목소리까지. 모든 일정이 끝났다는 사실이 몸보다 먼저 마음에 닿던 순간이었다. 그제야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조금씩 풀리고 발걸음도 가벼워지던 때였다. 그때 교육담당자였던 대위님이 정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한마디 건넸다.
"가는 길에 PX 들렀다 가셔도 됩니다. 안내해 드릴게요. 다음 주가 추석이라 괜찮은 거 많을 거예요."
톤도 표정도 그 말이 놓인 맥락도 지극히 일상적이었다. 배려 섞인 제안이었고 일정이 끝난 뒤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안내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내 귀에 닿는 순간 전혀 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 문장은 더 이상 "들러도 된다."는 허락이 아니라 "이제 들어와도 된다."는 초대처럼 들렸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이 세계에 입장하셔도 됩니다."
군부대에서 나는 손님이나 방문자인 외부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한 발 안으로 들어오라는 신호처럼 다가왔다. 그래서 더 감사하게 느껴졌다.
사실 PX는 늘 말로만 들었다. 싸다. 좋다. 거기 가면 정신을 못 차린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다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어른들의 말 중에는 괜히 부풀려진 게 꽤 많으니까.
PX는 어떤 곳일까? 가본 적 없으니 종종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곤 했다. 코스트코처럼 물건이 산처럼 쌓여 있는 곳일까? 규모는 클까?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의외로 아담한 공간이었다. 딱 보기에 작은 슈퍼마켓 정도. 순간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엥? 여기 맞나?' 그래서 괜히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봤다. 혹시 지하가 있는 걸까. 진짜 PX는 아래에 숨겨져 있고 여기는 입구만 보여주는 건 아닐까? 물건이 더 있을 것만 같은데 싶었다.
그 정도로 첫인상은 다소 김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물건들도 특별할 것 없어 보였다. 과자와 음료. 생필품들이 정리된 선반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진열대에 붙은 가격표를 보는 순간 PX의 진짜 얼굴이 드러났다. 아. 이건 과장이 아니었구나. 내가 알던 그 가격이 아니었다. 아니. 가격이라는 개념이 살짝 어긋나 있었다. 이 가격이 가능한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약간 문화 충격이었다.
처음엔 최대한 태연한 척했다. 괜히 흥분한 사람처럼 보이기 싫어서 천천히 둘러보는 척 아주 신중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손은 이미 바구니를 잡고 있었다. 머리는 침착했지만 몸은 이미 PX의 세계에 적응을 마친 상태였다. 이건 본능이었다.
영양제를 집으며 생각했다.
'그래. 이 참에 건강 챙겨야지.'
수분크림을 집으며 생각했다.
'이제 곧 겨울인데 수분크림은 필수지. '
에너지겔을 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언젠가 갑자기 에너지 끌어올려야 할 때 먹어야지.'
맛다시를 집을 때는 더 이상 고민도 없었다.
'맛다시는... 소중하지.'
ROKA 반팔티를 집으며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설득했다.
'이건 애들 기념품이야. 나를 위한 게 아니야. '
이쯤 되니 바구니는 점점 무거워지고 이상하게도 마음은 점점 가벼워졌다. 나는 분명 쇼핑을 하고 있었는데 동시에 묘한 힐링을 받고 있었다. 계산대에 서서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바구니 안을 한 번 보고 PX 담당자분의 얼굴을 한 번 보고 다시 바구니를 내려다봤다. 아마 그분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 처음 오신 분이구나.' PX에서는 누구나 처음엔 그런 얼굴을 하고 계산대에 서게 되는 게 아닐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길이라 운전은 조금 버거웠지만 트렁크는 묵직했고 기분은 이상하게 가벼웠다. 돌아보니 오늘 하루는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해냈다. 강의를 했고 또 하나의 경험치를 쌓았고 PX라는 새로운 세계에도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하루였지만 그래서 더 알찼다. 무엇보다 아주 유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