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점이 등장한 날

by 다몽 박작까


동두천에 있는 한 부대에 다녀왔다. 교육을 듣는 인원이 꽤 된다는 말만 들었지. 정확히 몇 명인지는 모르고 갔다. '많다'라는 말은 늘 상대적인데 그날의 '많다'는 문을 여는 순간 단번에 체감됐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대략 100~150명쯤 되어 보이는 군인들이 의자에 빼곡하게 앉아있다. 빈자리는 없고 공기는 가득 차 있었다. 그 공기만큼이나 시선도 한꺼번에 나에게 쏠렸다. 그 순간 살짝 숨을 들이마시게 된다. 아. 오늘도 쉽지는 않겠구나. 꽉 찬 공기에서 살짝 긴장이 올라왔다.


앞선 교육을 이미 한 번 듣고 잠깐 쉬었다가 다시 이어지는 내 강의였다. 그래서인지 얼굴들 위에는 공통된 표정이 얹혀 있었다.


'... 한 번 더?'


말은 없었지만 표정은 아주 솔직했다. 간부님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잠들어 있던 군인들을 하나둘 깨웠다.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이름을 부르고 깨우는 풍경은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 군부대 강의라는 세계에 들어온 뒤로 이 장면은 거의 세트처럼 따라온다.






교육 듣고 또 다른 교육을 들어야 하는 군인들에게 강의를 잘하고 싶었다.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지루하지 않게 가능하다면 도움이 되는 강의를 하고 싶었다. 이미 한 차례 교육을 소화한 얼굴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몸은 의자에 앉아 있지만 집중력은 이미 저 멀리 간 상태일 테고. '또 시작이구나.' 하는 마음도 분명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 욕심을 냈다. 잘해야겠다는 마음. 최소한 대충 하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


그래서 최대한 차분하게 시작해야지 마음먹었다. 첫 문장은 서두르지 않고 침착한 목소리로 속도를 조절하려고 했다. 괜히 서두르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말해보았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을 한 번씩 넣고 군인들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며 호흡을 맞추려고 했다. 목소리도 의식적으로 안정시키려 했다.


'괜찮아. 괜찮아.'


속으로 계속해서 주문을 걸고 있었다. 이 공간은 이미 여러 번 경험해 본 공간이고 이 내용도 충분히 알고 있는 이야기다. 갑자기 새로운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는 자리도 아니다. 그저 차분하게 내가 준비한 것들을 하나씩 꺼내 놓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마음과 달리 몸은 전혀 괜찮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느 순간 문장을 이어가려는 찰나에 머릿속이 갑자기 하얘졌다. 분명히 다음에 해야 할 말이 있었는데 그 문장이 통째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아. 이 얘기를 해야 했는데.'

'어. 이 사례를 빼먹었네.'


순간적으로 깨달았지만 이미 타이밍은 지나가고 있었다. 말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입은 자동으로 다음 문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스스로 체크해 두었던 몇 가지 포인트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결국 첫 번째 강의였던 도박중독 강의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나버렸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2시간 강의였고 도박중독 1시간 마약중독 1시간으로 나눠 놓은 구성이었다. 이미 도박중독 강의는 끝나버렸고 시계는 아직 한참을 가리키고 있었다. 남은 시간을 마약중독 강의로 채우며 조금 더 여유 있게 조금 더 천천히 이어갔다. 마약중독 강의에 넣었던 영상도 평소보다 길게 틀었다. 설명도 한 번 더 붙였다. 질문을 던지고 잠깐의 침묵도 허용했다. 그런데도 시간이 조금 남을 것 같았다. 아주 애매하게. 그래서 꺼낸 마지막 카드. 종이비행기.


A4용지를 나눠주고 말했다. 마약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나 오늘 강의에 대한 소감 등 자유롭게 적어달라고. 그리고 종이비행기를 접으라고 했다. 이 시간은 늘 비슷하다.


"진지하게 쓰면 작은 선물(간식) 드릴게요."


그 말을 하면 거의 반으로 나뉜다. 열심히 고개 숙여 쓰는 군인 반. 이미 마음은 PX에 가 있거나 꿈나라로 슬금슬금 이동 중인 군인 반이다.


그때 교육담당자셨던 정보 과장님이 조용히 다가와 속삭이듯 말씀하신다.


"강사님. 여기서 잘 쓴 용사 두 명 정도 골라 주시면 '상점'이 있다고 말해보세요. 대대장님께 말씀드리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와우. 정말 와우였다. 상점의 위력은 차원이 달랐다. 초코파이는 그 자리에서 힘을 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충 쓰고 이미 종이를 접고 있던 군인들이 다시 종이를 펼쳤다. 진짜로 대부분의 군인들이 다시 펼쳤다. 마치 시간을 되감기 하는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방금 전까지 대충이었던 글씨들이 정성으로 변했고 고개를 들고 있던 시선들이 다시 종이 위로 꽂혔다. 상점의 세계는 이렇게 냉정하고도 이렇게나 효과적이다. 충분한 시간을 드리고 모두 종이비행기를 접게 한 뒤 카운트를 시작했다.


"하나 둘 셋. 하면 다 같이 비행기 날릴게요.

하나.

둘.

셋."


그 순간 동시에 150개의 종이비행기가 날아올랐다. 이 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장관이다. 또 비행기를 날리는 군인들의 표정이 압권이다. 강의 중에는 절대 볼 수 없을 만큼 천진난만하다. 진지하게 각도까지 계산한 듯 접은 군인, 대충 접고 기세로 던지는 군인, 분명 어딘가 연습해 본 듯한 눈빛의 군인까지. 다양한 표정들이 겹쳐지며 종이비행기들이 공중에 날아오른다.


무대 쪽으로 날리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종이비행기들은 그런 지시를 들은 적 없다는 듯 각자의 길을 간다. 직진하는 녀석, 중간에 마음을 바꿔 급선회하는 녀석, 아예 시작하자마자 포기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녀석도 있다.






'상점'이 걸려 있는 이벤트인 만큼 공정함에 괜히 더 진심이 된다. 의자 아래로 숨어버린 녀석. 스피커 뒤로 용감하게 잠입한 녀석. 무대 모서리에 얌전히 누워 있는 녀석까지. 무대 사방에 흩어진 녀석들을 하나라도 놓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모으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앞에 앉아 있던 병사분들이 어느새 슬쩍 일어나 다 같이 돕기 시작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없이 그러나 굉장히 적극적으로. 다 같이 종이비행기를 한 곳에 모으는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참 귀엽다. 별것 아닌 종이비행기 몇 장인데 모두가 진심이다. 상점 때문일 수도 있고 그냥 재미있어서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열심히 도와주는 그 모습이 괜히 마음을 말랑하게 만든다.


잠깐의 소동이 지나가고 나면 무대 위에는 종이비행기 더미와 웃음이 남는다. 질서 정연해야 할 공간에서 잠시 허용되는 엉뚱함. 계급도 역할도 잠시 내려놓은 것 같은 천진함. 그 틈에서 드러나는 군인들의 사랑스러운 얼굴들이 있다.


그날의 종이비행기들은 멀리 날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 장면은 기억 속에서 꽤 오래 날아다닐 것 같다. 강의의 내용보다 어쩌면 그 종이비행기들이 더 오래 남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도. 군인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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