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km짜리 원정

by 다몽 박작까


오늘은 멀리 가지 않았다. 우리 동네 부대에 다녀왔을 뿐이다. 주소는 익숙한데, 공기는 다른 곳. 그동안 늘 멀리 있는 부대만 다니다 보니 '언제쯤 우리 동네에서도 연락이 올까?' 하고 괜히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그 연락이 왔다. 그것도 집에서 1.6km. 차로 5분. 첫째 아들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며 늘 지나던 그 부대였다. 오후 강의였기에 오전에 간호학원 강의 끝나고 집에 들렀다가 가도 충분히 여유 있는 거리였다.


'이렇게 가까운 곳이라니. 오늘은 좀 편하겠는데?'


사람은 참 단순해서 이동거리가 짧아지면 강의 난이도도 자동으로 내려갈 거라 착각한다. 그 착각은 강의장 문을 여는 순간 아주 단정하게 깨진다.


문을 열자마자 딱 봐도 높으신 한 분이 나를 반겨주셨다. 인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 이분은 줄 세우는 분이구나.' 나중에 들으니 대대장님도 아니고 사단장님이셨다. 사단 전체를 지휘하는 대대장님보다 훨씬 높은 분. 역시 사람의 촉은 이런 데서 쓸모가 있다. 사단장님은 맨 앞자리에 앉으셨다. 맨. 앞.


또 한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초록색 군복의 파도 한가운데 혼자만 하얀 가운을 입은 존재. 눈에 띄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그 존재감의 정체는 바로 군의관 선생님이었다. 의학 지식이 방대한 분이 내가 하는 교육을 들으러 와 계신다는 사실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처리되기 시작했다. 하필 강의 내용은 '응급처치와 심폐소생술'. 이때부터 내 심장은 CPR 실습 전에 이미 두근거리고 있었다. 간부님들 병사분들까지 200여 명이 모두 모인 자리.


'아. 오늘 강의 쉽지 않겠다.'






긴장도는 준비물의 개수로 측정된다. 다른 부대에 비해 교육 담당자분이 유난히 바빠 보이셨다. 심폐소생술 애니 모형이 무려 여섯 개. '아니, 이렇게까지...?' 싶었는데. 1시 반 교육인데 1시부터 전원이 착석. 사단장님의 위엄은 출석률로 증명되는 법이다.


나는 평소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성실하게 말 그대로 전투 모드로 강의를 했다. 혹시라도 허술한 부분이 보일까 싶어 설명은 한 번 더 예시는 하나 더. 내 안의 능력치에 조용히 레벨업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강의가 끝나자 질의응답 시간에 군의관 선생님이 조용히 손을 들고 말씀하신다.


"전반적으로 교육 내용은 좋았고요. 과호흡증후군 관련해서 최근에 조금 바뀐 내용이 있어서요."


아, 이 말이 왜 이렇게 고마운지. 지적이 아니라 업데이트였다. 나는 바로 감사 인사를 드렸다. 이런 조언은 얻어맞는 게 아니라 얻어먹는 거니까.






이제 정말 끝났다고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정리 멘트를 머릿속으로 한 번 더 훑고 다음 일정까지 가볍게 계산하던 그때였다. 교육 담당자분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전원 남아서 실습하고 퇴실합니다. 사단장님 지시로 간부님들 포함해서 전체 병사분들 다 남아서 애니 모형 실습하고 퇴실하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순간 공기가 눈에 띄게 바뀌었다. 막 풀어지려던 어깨들이 다시 굳고 끝났다는 안도 대신 묘한 긴장감이 자리를 차지했다. 나 역시 그 변화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아. 이건 엔딩 크레딧이 아니라 보너스 스테이지구나.'


그렇게 나는 병사분들과 다시 마주 섰고 애니 모형을 앞에 두고 심폐소생술 실습을 시작했다. 설명은 다시 또렷해져야 했고 손동작 하나하나에도 집중이 필요했다. 병사분들의 호흡, 간부님들의 시선, 현장의 긴장이 동시에 느껴졌다. 결국 심폐소생술 실습까지 모두 마치고서야 강의는 완전히 끝이 났다. 몸은 분명 더 지쳤는데 이상하게도 장면 하나는 또렷하게 남는 기분이었다.


그날의 강의는 다이내믹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경험치는 이렇게 쌓인다. 군부대 강의는 언제나 그렇듯 늘 예측 불가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까지 심지어 강의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까지도 방심할 수가 없다. 새로운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심장은 여전히 쫄깃해진다. 머릿속에서는 동시에 수많은 경우의 수가 빠르게 재생된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혹시 또 다른 변수가 생기지는 않을지. 순간순간 선택해야 할 말과 태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예전과는 조금 다르다. 분명 긴장은 되지만 이전처럼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이런 날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장은 버거웠던 순간들이 시간이 지나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다음 상황에서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붙잡아 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의가 끝난 뒤 전해 들은 한마디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사단장님께서 교육이 마음에 들었다며 내년에도 다시 하자고 하셨다는 이야기. 그 말 한마디에 그날의 피로와 긴장이 조금은 다른 의미로 바뀌는 느낌이었다.


집에서 불과 5분 거리. 1.6km. 가깝다는 이유로 가벼울 줄 알았던 하루는 그렇게 또 하나의 경험치가 되어 남았다. 멀리 가지 않아도 성장은 때때로 이렇게 일상 가까운 곳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는 안다. 성장은 늘 멀리서 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예상보다 가까운 곳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시작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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