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속이 어디세요?”
“직위가 어떻게 되세요?”
군부대 강의를 다니다 보면 늘 받는 질문이다. 군대는 조직 체계가 아주 세밀하다. 계급은 분명하고 상하관계는 또렷하다. 그래서 안정감이 있지만 어딘가 늘 각이 잡혀 있다. 흐트러짐이 없다 못해 뾰족하다.
보통 강의를 하러 가기 전에는 이것저것을 묻는다. 강의 장소는 어디인지. 대상은 누구인지. 인원은 몇 명인지. 그런데 그날은 묻지 못했다. 교통사고가 났기 때문이다. 갑자기 뒤에서 차가 들이받았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지만 충격은 만만치 않았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몸은 정직했다. 몸살이 제대로 왔다. 그럼에도 강의 일정은 이미 한 달 전에 확정된 상태였다. 개인 사정으로 군부대 강의 일정을 바꾸는 건 실례라고 생각했다. 군인들의 시간표가 얼마나 빡빡한지. 일정 하나 바꾸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강의를 다니며 너무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입원이나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면 말했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내가 감당할 일이다.’
그렇게 회복도 되지 않은 몸으로 아침 일찍 강의 장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제야 알았다. 이 부대는 일반 용사도 있었지만 간부가 훨씬 많은 곳이라는 걸. 자리에 앉아 있는 분들의 70%가 간부였다. 연륜이 얼굴에 고스란히 쌓인 분들. 말수가 적고 표정이 단단한 분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우리는 이미 많은 교육을 받아봤다.’라는 경험치가 깔려 있었다.
보통 아침 강의는 내가 에너지를 한껏 끌어올려 시작한다. 그런데 그날은 그럴 수가 없었다. 차분하게, 아니 솔직히 말하면 힘없이 시작했다. 강의 주제는 응급처치, 식중독,알코올 중독. 2시간 동안 3개의 강의를 꽉 채워 준비해 왔다. 강의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간부들이 많다 보니 집중력이 기본값이었다. 초집중한 눈빛으로 경청하시는 모습에 오히려 내가 더 긴장됐다. 그런데 중간중간 나눠드리는 초코파이가 유독 민망했다. 일반 용사들이라면 반길 간식이었겠지만 간부들에게 초코파이는 어쩐지 너무 유치해 보였다.
‘다음엔 간부용 선물을 따로 준비해야 하나?’
강의 중에 그런 쓸데없는 고민까지 하게 될 만큼 정신은 이미 조금씩 흐트러지고 있었다. 간부 대상 교육은 일반 용사 교육과 다르다. 일반 용사 교육은 졸지 않게 환기를 시켜야 하고 간부 교육은 졸지 않을 수밖에 없을 만큼 밀도와 질을 높여야 한다.
그렇게 1시간쯤 흘렀을까?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머리가 핑 돌았다. 몸살 기운에 타이레놀 하나 먹고 무리한 대가였다. 문제는 강의였다. 말은 하고 있는데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기운 없는 강사는 필연적으로 졸린 강의를 만든다.
그때 보였다. 졸려하는 간부들의 얼굴이. 하지만 졸면 안 되니까 눈을 부릅뜨고 버티는 얼굴들. 그 순간 깨달았다. 아, 간부들도 졸릴 수 있는 사람이구나. 컨디션이 안 좋다고 강의를 밀어붙일 게 아니라 방식부터 바꿔야 했다. 일반적인 전달 말고 어떻게든 소통해야 했다.
강의를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약을 먹고 누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이 내용을 더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그렇게 떠올린 게 깜짝 퀴즈였다. 기존에도 질문은 했지만 화면에 크게 띄우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화면에 대놓고 <깜짝 퀴즈>라고 써놓고 OX, 객관식, 주관식까지 섞어 만들었다. 화면을 띄어 놓고 연습을 하는데 집에 있던 초등학교 아들들이 반응했다. 퀴즈가 나오자마자 맞히고 싶어 했다. 사람은 원래 퀴즈가 나오며 맞히고 싶은 존재인 걸까. 이후 다른 부대에서 그 PPT로 강의를 했다. 200여 명의 일반 용사 대상 강의였다. 성공적이었다. 손을 번쩍 드는 용사들. 쉬운 듯 헷갈리는 문제에 참여도가 폭발했다.
돌이켜보면, 졸려하던 간부들 덕분에 강의의 밀도가 올라갔다. 그날은 지금까지 군부대 강의 중 가장 아쉬운 날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많이 배운 날이기도 했다. 다행히 그 부대는 후반기에 다시 나를 불러주었다. 주제는 기도 폐쇄 응급처치와 감염병. 이번엔 모형까지 챙겨가 최선을 다해 강의했다. 선물로는 초코파이가 아닌 견과류와 함께. 그리고 다음 해에 또 한 번 더 불러주셨다. 보통 한 부대에 한 번인데 몇 안 되는 ‘여러 번 부르는 부대’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인생도 강의와 비슷하다. 컨디션이 안 좋을 때도, 준비가 덜 된 것 같은 날도 있다. 좋은 강의는 완벽한 컨디션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부족했던 하루가 다음 강의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그날의 간부들은 내가 다시 준비하게 만든 가장 정확한 피드백이었다. 졸지 않으려 애쓰는 얼굴들은 지금도 내가 강의를 준비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