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 또 타는 사모님

환풍기 닦을 줄 아시나요?

by 다몽 박작까


따르릉릉릉.


아침부터 울리는 전화. 대체 누가 이 시간에- 했지만, 발신자는 우리 청소계의 스티브 잡스 빨래방 이모님이다. 이분으로 말하자면 손은 야무지고 말은 더 야무지고 청소라는 청소는 다 씹어먹은 경력직 중 경력직. 뭐랄까. 등짝에 "야매 기술" 하나쯤은 문신처럼 박혀있을 것 같은 분이다. 원래 여탕 청소를 하시다가 빨래방으로 이직을 하셨다. 전화를 받자마자 이모님은 숨도 안 쉬고 말문을 연다.


"내가 참다 참다 얘기하는데, 이건 아니야. 지금 청소 이모님들, 진짜 문제 많아. 서로 남 탓 하고 일 미루고."


순식간에 목소리 톤이 '정규직 퇴사 후 카페 창업 말리는 토크 콘서트' 수준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여탕 청소 이모님 두 분이 지인 사이지만 전생에 원수였는지 욕하며 싸움 중. 오늘 청소는 '대충함'. 왜냐하면 남탕 청소 아저씨가 늦게 나와서. (전에 여탕 청소를 하셨으니까)뭔가 알려주려고 하면 "내 일이 아니잖아요."하고 정색함. 손님 얘기 대신 전달하면, 왜 지가 그 얘길 하냐며 또 정색함. 이모님은 "사모님이 좀 말해줘요."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 오늘 직책은 사모님도 박반장도 아닌 '잔소리 담당 부장'이다. 근데 말이야. 어디 이게 쉬운 일인가. 이런 걸 잘 못해서 그런지 가끔은 진상 손님이 대단해 보일 때가 있다. 아무 데서나 당당하게 "이건 아닌데요?" 하고 말할 수 있는 그 깡.


나는 사실 그런 깡이 없다.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병원 때 다 써버렸다. 신규 간호사 시절 군기 빠졌다고 눈치받고. 위로 올라가니 이번엔 '잔소리 전달자' 역할을 해야하는데 그게 힘들었다. 군기라는 것이 상하수직관계를 타고 흐르는 물리학적 법칙처럼 존재한다. 그 시절이 떠오르며 결심했다. 이건 '한마디'의 순간이다. 하지만 말하는 방식엔 전략이 필요하다. 게다가 지금은 잔소리 해야 하는 분들이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으신 엄마 뻘인 분들이니 더더욱 어렵다.






내가 집접 들은 것도 아니고 빨래방 이모님 말만 인용하면 이모님과 두 청소 이모님이 링 위에서 한 판 붙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그래서 최후의 필살기를 꺼냈다.


"사장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역시 직장생활의 90%는 누군가의 이름을 빌려 말하는 기술이다.


"이모님 오신 지 얼마 안 되셨는데, 좀 어떠세요? 힘드시죠? 사실 두 분 오시고 나서 청소가 잘 안 된다는 얘기가 들려왔어요. 그런데 오신 지 얼마 안 되셔서, 적응하시느라 그렇겠지 하고 얘기 안 드리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사장님이 청소하시는 모습을 보시고는 더 신경 써달라고 부탁하셔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아무리 좋은 곳을 가더라도 지저분하면 그곳에 가고 싶지 않잖아요. 이모님이 우리 찜질방 얼굴을 닦아주시는 거예요. 앞으로 조금만 더 신경 써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청소하시는 분들끼리 합이 잘 맞아야 서로 의지도 되고 힘도 받을 수 있는 거거든요. 두 분이서 서로 소통하며 잘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았는데 여기까지만 말씀드렸다. 기분 나빠하실까 봐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다. 놀랍게도 이모님은 화통하게 받아주셨다.


"그런 건 언제든 말해야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앞으로 더 잘할게."


이게 뭐야. 싸울 각으로 준비했던 심장이 무색하게 푸딩처럼 부드럽게 넘어갔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이모님이 말하신다.


"근데 나도 할 말이 있어. 흡연실 환풍기 좀 닦고 싶은데... 너무 높아서 못 하겠어."

"...오, 그래요? 그런 거라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사다리 출동이다. 작은 사다리를 들고 당당히 나섰다가 환풍기 앞에서 멈칫. 생각보다 높다. 매우 높다. 작은 사다리는 그냥... 인형 의자였다. 그래서 대빵 큰 사다리로 다시 교체. 정말이지. 내 인생에서 이토록 진지하게 사다리를 두 번 고른 날이 있었을까. 사다리 맨 위, 맨 발로 올라가 본 환풍기의 속살. 우선 물티슈로 닦아보았다. 닦이긴 하는데 이상하다. 환풍기 구멍에 먼지가 가득 차 있어서 공기를 빨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열 수 있을까 하며 그냥 손으로 밀어 넣어 먼지를 꺼내었다. 겉에만 닦아 볼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뒤로하고 환풍기를 여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왼쪽으로 돌리면 열림, 오른쪽으로 돌리면 잠김이라는 표시를 보았다. 조심스럽게 왼쪽으로 돌려보았다. 처음에는 열리지 않았는데 결국 '딸깍' 열렸다.


열리고 나니 더 충격이다. 그곳엔 술빵이 있었다. 진짜로 달콤하고 부드럽고 포슬포슬한. 그러니까 술빵 같은 먼지떼기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어느 장인의 손끝에서 탄생한 것처럼 예쁜 모양의 먼지꽃. 문제는 이걸 보고 침이 돌았다는 사실. 먼지를 떼내며 생각했다.


"이런 게 폐에 쌓이면 그게 바로 병이지."


흡연실 환풍기 하나가 작은 의학 강의가 되었다. 환풍기 속을 다 닦고 나니 바람이 통한다. 비로소 환풍기답게 '휭-' 하고 돌아가는 느낌.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사다리는 배신하지 않는다. 올라갈 땐 괜찮아 보였던 자세가 환풍기 두 개째부터는 고문 자세가 된다. 목은 꺾이고 팔은 저리고 눈에는 먼지 들어가고. 위험한 자세로 자세를 트는 순간. 사다리가 '슥'하고 흔들린다. 머릿속에 엉덩방아 플래시백이 재생된다. 아찔하다. 지금 이 찜질방에서 사모님 엉덩이 부상으로 구급차 불렀다는 소문은 도저히 견딜 수 없다. 결국 다시 내려와 사다리 고정. 다시 올라가 마무리하고 모두 환풍기 닫고 숨을 돌렸다.



깨끗해진 환풍기






몸은 후들후들. 팔은 젓가락질 불가. 뒷목은 뻐근. 그런 상태에서 먹은 건 냉면 + 까르보나라 돈까스. 이 조합이 어딘가 모르게 부조화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나에겐 천상의 페어링이다. 소스와 국물의 더블액션으로 영혼이 씻겨나갔다.





그리고 냉면집 옆 작은 옷가게. 진열대에서 6,800원짜리 반팔티 발견.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오늘 술빵 먼지를 치우고 생명을 구한 여자가 여기 있어요."


그리하여 티셔츠 5장 득템. 5장에 34,000원. 하지만 나에겐 하얀 천으로 만들어진 금메달이다. 사다리를 내려오며 생각했다. 다음에도 필요하다면 또 올라가자. 먼지는 쌓이고 우리는 살아간다. 그리고 가끔 우리 안의 먼지도 술빵처럼 생겼을지 모른다.



인생이 가르쳐준 교훈 :

먼지를 닦는 일은 몸이 힘들고 잔소리를 전하는 일은 마음이 힘들다.

하지만 둘 다 하고 나면, 바람이 분다.

뭔가 '휭-' 하고 뚫리는 기분.

그리고 그 바람을 느끼는 순간,

6,800원짜리 티셔츠가 세상에서 제일 잘 산 물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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