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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완 Jan 09. 2023

이효선이 알리 없다 1

숨구멍 1

1980-11-01


 난 내가 이 촌구석에, 가끔 내리는 빗물을 기다리는 뿌리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삶이었는데. 이젠 뭣도 아니야. 아일랜드에 넌 없으니까. 넌 가지도 못했으니까.

 

장례식장에서 나왔는데 옆에서 누가 담배를 피웠어. 평소 같았으면 질색을 하면서 팔을 휘휘 저어겠지. 그런데 그날은, 그냥 멍하니 서있었어. 연기를 그 자리에서 다 마셨어.


그때 알았어. 그날의 네 고백이 모두 유언이 되었다는 것을. 담배 연기처럼 흩어진, 유언이 되어버린 네 고백이 고스란히 내 폐에 적혔어.


너는 네 유언을 내 폐에 적었어.


숨을 들이쉬고 내실 때마다 네 유언은 내 온몸을 구석구석 떠돌겠지. 알아버린 나는 눈물 흘릴 수밖에.


  

  이효선이 알 리 없다.


 새벽이 방 안으로 들어와 주위를 온통 푸르게 물들일 무렵, 이효선은 벽장 깊숙이 숨겨놓은 짐가방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이효선은 열쇠로 대문을 단단히 잠갔다. 대문 현관에 붙여진 십자가를 보며 아주 오랜만에 신께 기도했다. 이 집의 어떤 마(魔)도 다시는 나를 건드리지 말길. 칼춤을 추든지, 염병을 떨든지 모든 것이 이 대문 안쪽에서 끝나길. 짧은 기도를 마치고,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안개가 이효선의 발자취를 모두 감췄으므로 이효선이 떠나는 걸 본 이가 없다. 모처럼 다행이었다.


  터미널에 들어서고 타는듯한 갈증을 느낀 이효선은 가게에서 물을 산 후 급하게 뚜껑을 열다, 그만 바닥에 뚜껑을 떨어트렸다. 한 번에 반쯤을 다 마셔버리고, 남은 물을 화장실 세면대 위에 버렸다. 발급한 표를 보며 버스 위에 올라탔다. 짐가방이 무거워 엉거주춤 걷다가 자리를 찾았다. 긴 운행 시간 동안 이효선은 한잠도 자지 않았다.


  상경한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친구는 문을 열다말고, 바싹 말라버린 이효선의 얼굴을 보며 잠시 주춤했지만, 곧이어 짐가방을 대신 들고 “잘 왔어. 너무 좋다”고 이야기하며 지낼 방으로 안내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김영생이 그렇게 가버린 후 굿판과 술판이 끊이지 않고, 피폐해진 마을 구석구석 사이비들이 활보하고 다닌 걸 얘가 모를리 없다. 몸이 아예 피어나지 않은 나이, 굿판 이후 술에 취하지도 않은 구경꾼에게 희롱을 당했을 때 얘는 핏발 서린 눈을 한 채 "도망칠 거야. 여기 있으면 말라 비틀어질 거야."라고 토해내듯 말했다. 안개에 부딪쳐 아무도 듣지 못했겠지만, 그 사자후는 아주 오래 내 마음에 울려 퍼졌다. 나도 너도 도망쳤구나. 나는 이제야. 그런 생각을 하며 농에서 베개와 이불을 꺼냈다. 이불에선 해묵은 냄새가 났다.


“효선아. 자?”

 

노크하며 방문을 열 때 된장국 냄새와 기름 냄새가 방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효선은 아주 오랜만에 머릿속의 생각을 내뱉었다.

 

“나 졸려.”


방 안의 스위치를 끄고 소리 나지 않게 방문을 닫아주었다. 견딜 수 없이 졸렸다.




*앞으로 연재할 '숨구멍'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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