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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완 Jan 13. 2023

내가 뭘 안다고.

사람들 사람들 1

  조카 산이가 입원했다. 둘째 조카가 퇴원하고 며칠도 지나지 않아, 녀석이 장염으로 들어갔다. 남들 퇴근 시간보다 훨씬 늦게 끝나는 형부, 갓난쟁이를 데리고 병실에 갈 수 없는 언니. 둘은 발을 동동 구르다 결국 친정에 부탁했다. 아이가 아픈 것만으로 이미 머리 아플 텐데. 우리한테 맡긴다고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걸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루는 아빠가, 다음 날은 내가 간호하기로 했다. 이것저것 물어볼 때마다 귀찮은 내색 한 번 보이지 않는 친절한 간호사 선생님이 지침 사항과 달리 아이의 보호자가 계속 바뀌자 단호하게 한마디 하셨다. 보호자는 부모, 부모만 교대로 보호자를 할 수 있다고. 다른 분은 원칙상 안 됩니다. 사정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고 대답하려다, 고장 난 인형처럼 그저 ‘네네’를 반복했다. 간간이 죄송하다고 말하면서. 이런저런 사유가 있어도 병원이 그걸 다 봐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언니는 미안한 마음에 커피를 사주겠다고 했다. 병원이 있는 상가 1층에서 나와 아빠가 마실 라떼를 테이크아웃했다. 아빠는 자기 몫의 커피를 나에게 양보하겠다며, 냉장고에 넣었다 마시라고 했다. 그럴 필요 없다고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내가 졌다. 병원에 있으면 앉아만 있어도 목이 탄단다, 단 게 필요하단다. 냉장고 문을 열어 커피를 넣으려는데 군것질거리가 있었다. 요플레며, 주스며, 초콜릿 등 꽤 많다. 장염 걸린 아이가 이걸 먹을 리가 없고, 아빠가 입이 심심해서 사다 놓으신 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점심 식사 시간이 되었고 보호자 식과 아이가 먹을 미음이 나왔다. 보호자 식에 딸기우유가 딸려 나왔다. 나보다 아이가 더 반겼다. “와, 내가 먹을 딸기우유다!”


 “산아. 이거 네 거 아냐.” 억울하다는 듯 쳐다본다. 왜 어른이 자기 걸 뺏어 먹냐는 눈초리가 제법 따갑다. 알아듣게 설명하려 애썼다. (보호자식을 가리키며)이건 이모 거, 산이는 죽. 이모 식판에 담겼고, 너는 아직 뱃속에 우유가 들어가면 아플 거라고, 퇴원도 늦어진다고 이야기했다. 아이가 먹을 환자식 뚜껑을 여니 한숨이 나왔다. 아무 건더기 없는 허옇고 멀건 미음, 간장, 동치미 무 잘게 썬 것. 간장도 넣지 못한다고 했다. 간이 조금이라도 세지면 연약해진 아이 몸이 자극을 견디지 못해 토할 수 있다고. 아이는 밥을 먹으면서도 딸기우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아쉬워하는 게 안쓰러워서 그러면 집에 가져가서 나중에 먹으라고 냉장고에 갖다 놓았다.


 저녁에 나온 조미김과 견과류도 그랬다. 저거에 죽이랑 먹으면 맛있겠다, 견과류 간식으로 먹고 싶다, 짜고 단단한 것들. 아이가 먹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똑같은 설명을 반복하고 이것도 가져가라고 냉장고에 넣었다.


 열을 동반한 장염이라 고열인지 살피고, 해열제를 먹이고. 병원에서 다 알아서 해준다고 했지만, 아이가 까무러지거나, 이마가 뜨끈해질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목이 타서 냉장고에 있는 커피를 꺼내려다 낮에 내가 커피를 마시는 걸 보며 저도 마실 음료수 좀 달라고 하는 모습이 생각나 그만두었다. 이따가 아이가 자면 마시자.


 간신히 아이를 재우고 깜깜해진 방에서, 애써 냉장고에 보관한 커피를 꺼내다 깨달아 버렸다. 아빠가 산 간식이 아니라, 먹지 못한 간식이구나. 병원에 있으면 달콤한 게 먹고 싶다 하셨으면서. 맨 아래 칸, 야채 보관함에 포장도 벗기지 못한 삼각김밥도 이제야 보였다. 유통기한이 하루 지나있었다. 냉장고에 둬서 서늘해진 커피를 입에 머금고 데워 마시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나를 키우며 나 때문에 못 먹은 게 얼만가. 또 나 때문에 못 해본 게 얼만가. 아이가 덜 고단하면, 잘 풀리면 그때 가서 해야지 꾹꾹 눌러 참은 것. 냉장고에 두다가 유통기한을 넘긴 삼각김밥 같은 것이 인생에 몇 번이나 있었을까. 나 먹으라 양보한 커피 같은 것은 또 몇 번이나 있었나. 그게 뭔지, 제대로 아는 게 있나.


 다음날 아빠가 돌아왔다. 아침 식사 시간, 새벽에 몇 번을 깬 터라 아이는 입맛이 통 없었다. 잠깐 일어나 마른 입 안에 보리차 몇 모금 축인 뒤 그 애답지 않게 늦게까지 잤다. 걱정되는 마음에 아빠가 억지로라도 깨워 먹이려고 했다. "산이, 밥 먹어야 한대. 그래야 검사도 받고, 괜찮으면 집에 가지." 아이가 내 몸에 착 달라붙어 싫다고 칭얼대자, 아빠가 "하루밤 사이에 아예 아기가 됐네. 얼른 일어나." 채근하시는데,


 내가 "원래 어른도 아프면 애가 되잖아요. 애들은 어떻겠어요?" 아이를 감싸자 가만히 계신다. 아, 나도 입을 다물었다. 뭘 아는 것처럼, 어른인 것처럼 떠드나. 아는 거 하나 없으면서. 모르는 게 천지이면 아이나 다름없지. 내가 뭘 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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