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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완 Jan 17. 2023

사랑스러운 공간

사람들 사람들 3

  가랑비가 내리는 날, 오랜만에 대학 동기와 행궁동에 다녀왔다. 동기가 꼭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한 식당에서 해산물 덮밥 정식을 먹은 뒤, 소화도 시키고 구경도 할 겸 잠시 걷기로 했다. 고궁의 운치 있는 풍경, 가늘게 내리는 빗소리, 나무와 비 내음이 참 좋다. 추위와 비를 이겨낼 만하다. 수원에서 보기 드물게 널찍한 곳이라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면 가슴에 맺힌 답답함이 내려간다.


 연식 있는 주택을 개조하여 만든 카페와 서점, 소품 가게는 우아한 고궁과 달리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옛 궁궐과 가게들. 한데 모으면 따로국밥이 될 법도 한데, 희한하게 어우러지는 게 재미있다. 예술가들도 자리 잡고 있어 곳곳에 벽화와 시가 적혀있다. 늘 느끼지만, 행궁동은 다릿심 쓰기가 아깝지 않다.


 지금은 수원 시민, 서울이나 지방 등 멀리서 온 사람들로 붐비지만, 행궁동은 원래 이렇게 활기찬 곳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에 문화유산을 보러 가는 견학지, 그뿐이었다. 상권 자체가 거의 죽어있어 슬럼가나 다름없다고 보는 사람들도 상당했는데, 도시재생사업도 함께 진행하며 생기 있는 행리단길로 탈바꿈되었다. 처음에는 카페 위주였으나, 이후에는 특색 있는 식당과 소품가게가 생기면서 지금은 젊은 층으로 붐빈다.


 그럼에도 나는 행궁동이 활성화되기 전부터도 참 좋아했었다. 슬럼가나 다름없다고 해서, 행궁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예 없었던 게 아니다. 애정을 초석으로 삼아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가게를 세운 소수의 사장님이 계셨다. 고궁을 둘러싼 산과 나무, 불어오는 산들바람,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진 풍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장사를 대충 하겠는가. 열두 개의 고명을 넣은 가락국수를 파는 식당과 향기로운 차, 은은한 빛깔의 도자기 그릇 위에 감말랭이를 가지런히 내어 파는 전통 찻집이 있었다. 가락국수집은 국수를 먹지 않아도 오랫동안 걷느라 목마른 분들에게 물 한 잔 제공하겠다는 문구를 가게 유리창에 붙였고, 찻집은 갓 만든 인절미가 있는데 냄새만 풍기고 손님에게 드리지 않는 건 미안하다며 포크로 콕 집은, 고소한 콩가루 향기 나는 떡을 내밀었다. 그런 숨겨진 보물 같은 공간을 아꼈다. 지금은 행궁동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 그 애정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뿐이다.


 언젠가 더 예뻐질 줄 알았는데, 정말 예뻐졌다. 전체가 아름다워졌다. 죽은 동네를 살린 게 수억 대의 예산, 질리도록 퍼붓는 홍보도 아닌, 애정이라니. 돈보다 아직 사람의 힘이 세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힘 중 가장 센 것은 사랑. 오늘의 행궁동을 거닐면서 세상이 돈에 미쳐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아직은 사람과 사랑이 먼저라는, 순리가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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